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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경민의 시시각각

지천명 맞은 해외건설 '덕수'의 독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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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정경민
경제부장

1965년 태어났으니 올해 딱 50이라오. 지독스럽던 장대비와 모기떼. 그 속에서 난 태어났다오. 태국의 파타니와 나라티왓이란 곳 이름이나 들어봤소? 말레이시아 국경 근처 오지지. 불교 국가 태국에서 주민의 80% 이상이 무슬림인 곳이니 오죽 살벌했겠소. 거기서 내 아버지들은 고속도로를 놓았지.

98㎞밖에 안 됐지만 고물 장비와 맨손으로 벌인 눈물겨운 사투였소. 참, 그 속엔 이명박 전 대통령도 끼어 있었네. 입사 2년차 경리사원이었던 그는 폭도로 변한 인부들로부터 온몸으로 금고를 지켜내 고 정주영 회장의 눈에 들었다지. 요즘 ‘국제시장’이란 영화의 주인공 덕수가 국민 아버지로 떴다지요? 태국 밀림에서 악전고투했던 내 아버지들도 덕수였소.

 내 이름은 ‘해외건설업’. 매년 11월 13일 ‘해외건설업·플랜트의 날’도 현대건설이 65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낸 기념일이라오. 540만 달러짜리 공사를 하고 300만 달러나 적자를 봤지만 값진 경험이었지. 훗날 국내외 손가락질에도 정주영 회장이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뛰어들었던 배짱, 거기서 나온 거지. 어디 그뿐인가. 65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105달러였소. 케냐와 동급, 필리핀의 절반이었지. 변변한 수출품이나 있었나. 팔아먹을 게 없어 부녀자 머리카락은 물론 오줌까지 중풍치료제 원료로 수출했던 나라였소.

 척박했던 시절 내 아버지들이 진짜 덕수였소. 76년 현대건설이 따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대금은 9억3000만 달러나 됐지. 그해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29억6000만 달러였다면 말 다한 것 아니겠소. 내가 송금하는 날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겼지. 두 차례 오일쇼크 땐 정말 나라 망하는 줄 알았소. 내가 벌어온 달러가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 꿈이나 꿀 수 있었겠소.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도 마찬가지였지. 그해 내가 벌어온 게 140억 달러였소. 한데 세 차례 국가부도를 넘기는 데 일등공신이 나였다는 사실, 아는 사람 별로 없더구먼.

 2000년대 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오. 기름 값이 다시 뛴 덕분이었지. 그 사이 내공도 일취월장했다오. 70~80년대엔 건축·토목이 주종이었지만 이젠 플랜트 수주가 65%나 돼. 미국 건설·엔지니어 전문지 ENR이 2013년 8월 한국을 해외건설 6대 강국으로 꼽았을 정도라오. 48세 되던 2013년 12월 2일 내 누적 수주액도 6000억 달러를 넘었지. 걸핏하면 날 두고 ‘토건’이니 뭐니 깔보던데 지난해 번 것만 660억 달러였소. 반도체(627억 달러), 석유제품(512억 달러), 자동차(489억 달러) 수출액보다 많았단 말이오. 대망의 누적 수주액 7000억 달러 달성도 코앞에 두고 있소.

 그런데 말이오. 공자는 나이 50에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깨우쳤다는데 난 아직 멀었나 보오. 내 아버지나 다름없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 철썩같이 믿었던 내가 바보지. 공정거래위원회 칼날이 그리 서슬 퍼런 줄 미처 몰랐소. 지난해에만 과징금을 8496억원이나 맞았다오. 지난 MB정부 때 호남고속철도·경인운하·4대 강 사업 입찰을 하면서 건설회사끼리 짜고 쳐 국가재정을 축냈다는 죄목이었소. 그래, 사다리 타서 나눠먹은 거 맞소. 욕 먹을 짓 한 거지. 한데 나도 할 말은 있다오. 임기 중 초대형 공사를 끝내려니 정부도 무리수를 두지 않았소. 공사구간을 쪼개 1공구에 1사만 맡도록 하고 최저가 입찰제를 강요했지. 사다리 타라고 정부가 등 떠민 격 아니었느냐 말이오. 그래 놓고 정권 바뀌자 안면몰수라니. 내 속은 이미 숯덩이요.

 짜고 친 죄 달게 받겠소. 다만 명예만은 지켜주오. 이중삼중 국내 처벌에 해외에서 피땀으로 쌓은 내 위신이 말이 아니라오. 내 활약에 배 아팠던 외국 건설사들도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있소. 50번째 생일, 케이크는 바라지도 않소. 해외에 나가 맘껏 뛰게 내 이마에 붙여놓은 범죄소굴이란 빨간 딱지, 그것만이라도 떼줄 순 없겠소.

정경민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