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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왕비가 인생의 목표를 수정했더라면

중앙일보

입력

얼마 전 처음으로 ‘옷’에 대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옷을 잔뜩 보내주었는데, 내 친구 K가 그 옷들이 정말 예쁘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내가 보기엔 그저 집에서나 입을 만한 쭉쭉 늘어나는 홈웨어였는데, K는 그 옷을 당장 외출할 때 입으라는 거였다. 나는 마뜩치 않은 기분으로 그 옷을 입으면서, 꿈속에서도 뭔가 친구에게 조종 당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옷을 한 겹이 아닌 여러 겹으로 껴입으라면서, 자기도 그렇게 입었다며 자랑스럽게 자신을 좀 보라고 했다. 네다섯 벌의 옷을 아무렇게나 겹겹이 껴입은 친구의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꿈속의 나는 친구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나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꿈속의 나는 친구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잠에서 깨어 곰곰 생각해 보니 나의 콤플렉스가 겹겹이 반영돼 있는듯했다. 나는 그 꿈이 암시하는 바를 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첫째, 나는 ‘옷을 잘 못 입는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나는 내 단조로운 옷차림이 싫으면서도, 늘 똑같은 스타일의 옷들만 산다. 둘째, 나는 K의 말이라면 ‘정말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껌뻑 죽는 경향이 있다. K의 의견에 반대하면 친구가 화를 낼까 봐 나는 아직도 그녀를 두려워한다.

셋째, 나는 K의 세련된 옷맵시에 대해 부러움과 질투를 느낀다. 내 옷차림이 ‘너무 단조롭고 심심하다’며 ‘밝고 화사하게 입어라’라는 잔소리를 자주 했던 그 친구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옷을 사러 간 적도 있었지만, 나는 그 시간이 즐겁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는 진심으로 선의를 베푼 것이지만, 나는 안 그래도 약해빠진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었다. 꽁한 데가 있는 나는 그 친구에게 이런 감정을 말한 적이 없다. 무척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내 은밀한 상처를 ‘기록’해 보니 뭔가 후련함이 느껴진다. 허물없이 지내는 소중한 친구에게까지도 이렇게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인가 싶기도 하다.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

나는 이런 꿈을 꿀 때마다 내 무의식이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잖아. 너는 너 자체로 충분히 소중한 존재야’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자존감이 유난히 약했던 나는 사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거의 알지 못했다. 자존감이 약한 상태에서 자존감이 강한 척 연기까지 하느라 내 소중한 청춘을 다 흘려보낸 것 같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넌 네 마음대로 살아서 참 좋겠다’고 말해 정말 당황스러웠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부터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판타지임을 알게 되었다. 온전히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마음의 변화무쌍한 풍경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또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는 신기루 같다. 하지만 ‘내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헌옷들로 꽉 차 곧 터질 것만 같은 낡은 옷장을 어느 날 큰맘 먹고 차곡차곡 정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우리는 내면의 옷장을 차근히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쏟아진 옷장을 정리하며』를 쓴 심리학자 게오르그 피퍼는 자신의 아픔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이야말로 치유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 옷은 ‘버릴 옷’, 이 옷은 ‘기부할 옷’, 이 옷은 ‘친구에게 줄 옷’ 등으로 오래된 옷을 분류하는 것처럼, 우리의 트라우마도 빛깔과 스타일이 다른 옷처럼 각자의 ‘의미’를 지닌 이름표를 붙여줄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을 자신의 엑스트라로 생각

오늘 우리가 함께할 그림형제의 동화 『백설공주』에는 ‘질투심의 위험’이라는 분류용 스티커를 붙여주어야 할 것 같다. ‘욕망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절반 이상은 처분해야 할 낡은 옷가지들이 바로 이 질투심 계열의 상처들이다. 타인이 나를 공격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질투심 때문에 스스로 입는 상처의 대명사, 그것이 바로 ‘백설공주의 계모’인 마녀의 캐릭터다.

어른이 되어 백설공주 이야기를 다시 읽으니, 마녀가 백설공주에 대한 질투 때문에 점점 사악한 인간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더욱 가슴 아프다. 질투라는 감정이 얼마나 ‘처리’하기 어려운 감정인지를, 어른이 되어서야 더욱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마녀가 아니라 왕비였다. 아름다운 왕비에서 사악한 마녀로 타락하기까지, ‘질투’의 감정은 그녀의 자긍심을 시나브로 좀먹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그녀는 ‘백설공주를 죽이는 방법’의 강도를 점점 더 높여간다. 처음에는 사냥꾼을 시켜 백설공주를 대신 죽이게 했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직접 허리띠를 들고 백설공주를 찾아간다. ‘허리띠’를 졸라매어 질식시켜도 일곱 난쟁이들이 백설공주를 살려내니, 다음에는 ‘독 빗’을 들고 가서 백설공주의 머리를 빗겨준다.

그래도 일곱 난쟁이들이 백설공주를 다시 살려내니, 그녀는 마지막 수단으로 ‘독이 든 사과’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그동안 마녀의 속임수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백설공주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사과 전체에 독이 퍼져 있지 않고 반쪽에만 독이 든 사과를 들고. 독이 들어 있지 않은 쪽을 자신이 직접 베어 무는 여유까지 부리며. 질투에 눈이 먼 마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절대 누구와도 진심으로 ‘협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오직 마법의 거울만을 믿는다.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의 빛나는 인생의 엑스트라쯤으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행복해진다는 것

그와 달리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를 통해 ‘타인과 함께 공생하는 법’을 배운다. 살아남기 위해 일곱 난쟁이들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했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청소와 요리, 바느질은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고난에 찬 세상살이’의 눈물겨움을 배웠을 것이다.

반면 마녀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누구와도 따스한 연대감을 나누지 못한다. 질투심과 지배욕이 결합되어 그 누구와도 유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마녀를 불행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마녀는 자신이 불행한 이유가 ‘백설공주가 자신보다 예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착각이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존중과 이해’ 속에서 세상을 향한 진심 어린 애정을 느낀다는 점이다.

행복의 뿌리는 연대감이지 소유욕이나 성취감이 아니다. 소유욕과 성취감은 쉽게 빛바래지만, ‘우리가 함께하기에 삶이 아름다워진다’는 믿음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지속적인 세계관으로 자리 잡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 타인의 존재로 인해 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느낌은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적어도 빛바래지 않는다.

우리가 백설공주보다 마녀에게 더 연민을 느낀다면, 우리 안의 뿌리 깊은 질투심이 혹시 언젠가는 처벌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자 아들러가 마녀를 상담했다면, 그녀에게 ‘인생의 목표를 수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하지 않았을까. ‘더 예뻐지는 것, 아니 나보다 더 예쁜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법,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법’을 새로운 인생의 이정표로 삼았다면, 마녀는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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