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5)충주박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충주박씨의 시조는 고려중엽 부정을 지냈던 박영. 그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 언창(사대왕)의 후손으로 전한다.
시조 영의 8세손 박광리는 고려말 충박의 대표적 인물. 개성 소윤이었던 그는 권신 임현미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이에 항거하다 파직되었다. 그후 아들 박진과 소는 고려의 정국이 어지럽자 벼슬에의 미련을 훌훌버리고 충청도 공주(현 대전시가상동)로 낙향한다. 오늘날 충주박씨는 대부분 이 두형제의 후손들이다. 전국 4천여가구에 인구는 약2만명.

<「기앙명현」의 선구>
충주박씨는 조선조에서 영의정1명, 대제학1명, 정백리1명, 용군3명등을 냈다(문과급제 19명, 무과급제 19명).
박효함(세종조 강능부사) 박지흥(세종조 학자) 박형문(성종조·창원부사) 박형무(충청병사) 등은 조선초기의 인물들.
박지흥은 학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 끝까지 벼슬을 거절하고 선비정신용 지켰다.
박정(성종조·학자)·상·석등 3형제는 모두 학문이 뛰어나 송나라의 소동파의 「부자삼소」에 견주어 「동국삼박」이라 불렀던 문장이다.
이들 3형제중 박상은 중종 반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숱한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그는 중종반정직후 사동원 헌납에 임명되었다가 마침 왕실친척이 위계를 뛰어넘어 당상관에 오르자 이를 비난했다가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다.
중종6년 교리·응교를 거쳐 담양부사가 되었다. 이때 그는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진씨의 복위를 상소했다가 조림역에 유배되었다. 중종11년 다시 불려나와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이해 겨울 모친상으로 사직한다. 그후 문료중식에 장원, 라주목사를 지내기도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박상은 「기앙명현」중의 선구자였다』고 평한다. 그가 상소한 「신비복위상소」는 표면상 억울하게 폐위된 신비의 복위를 칭원한것이였으나 내면적으로는 국정을 전단하는 훈구파를 성토하는 도전장이였다는 것

<14년 정승지낸 명신>
막내인 박고 또한 중종5년 우승지를 지내다 중종반정의 권신 김안로가 권ㅅ를 부리자 자청하여 남원부사로 나갔다. 후에 도승지를 지냈으나 탄핵을 받고 공주특사로 좌천, 곧 파면되었다. 그러나 다시 기용되어 대사성을 거쳐 명종때 전주부윤, 동지중추부사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이 조선 항조선의 명재상 박형이다.
박형은 명종조에 대제학,대사의,좌의정등을 거쳐 선조5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정승의 자리를 14년간이나 지킨 명신이었다. 명종때는 대사동으로 있음ㄴ서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신 윤원형과 정치승려 진우를 탄핵해 끝내 몰아내기도 했다.
이일로 백성들이 연일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한다.
『박형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면서도 온호하고 겸허한 인품을 갖고 있었다.』고 후손들은 말한다. 선조원년 그가 대제학에 오를 때 그보다 나이많은 퇴계 이황이 제학으로 있었다.
그때 그는 『나이 높은 큰선비는 도리어 소임에 있고 후진 초학은 중직에 처하여 있으니 청하옵건대 이황에게 대제학을 옮겨 제수하소서』라고 간절히 사양했다.

<강직엔 명도 손들어>
이같은 그의 진언으로 대제학의 자리는 이황에게 돌아갔다. 그후 얼마안가서 이황이 대제학을 사퇴하니 선조는 다시 박정용 대제학에 기용한다. 다시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말해주는 일화 한토막.
그가 우의정에 울라 명의 신종의 등극을 하례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을때 다른 외국사신들은 좁은문으로 들어갔으나 박정은 국서를 받들고 보무도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갔다.당시 속국의 사신들은 정문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박형은 정문을 열지 않으면 국서를 바칠수 없다고 강경히 항의해 정문을 열게했다한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그후부터 우리나라 사신은 항상 정문으로 출입했다.
박형은 선조조의 동서분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서의 조정에 진력하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을 물러났다. 그가 관직을 물러난것도 그의 강직함 때문이었다. 그는 척신세력을 궁중에서 몰아내고 육행(육행=효·우·목·인·임·휼)이 구비된 선비들을 천거했으며 이이와 성군을 옹호하다 끝내 탄핵을 받아 평소 못다한 한을 품고 자운산에 은거했다.
그의 시는 중국사신이 와서도 「송나라 인물이요, 당나라 시조」라 할만큼 당시의 풍을 즐겼으며 글씨는 송설체를 잘썼다한다. 박형과 학문적 경향을 달리하는 퇴계 이황도 그를 보고 『박모를 보면 이조청빙을 대한듯하여 정신이 상쾌해진다』라고 찬탄했다한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의 격동기에 충주박씨는 숱한 의병장과 의사를 배출했다. 박포수(선조조·형조임랑)박이룡(열의)박지효(의사) 박사진(의사) 박유일등이 구국의 일선에서 활약,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박유동은 이정조에 송시열등과 교분이 두터운 당대의 석학이었으며 박응훈은 선조조의 유명한 효자. 그는 친상을 당하여 시묘를 지낼 때 그 정성이 어찌나 지극했던지 범이 나타나 탈상때까지 보호해주었다한다.

<명시「떠나가는 배」>
일제의 암흑기에 충주박씨는 한국순수시의 선구자 박용철을 배출했다.
「나두야 간다/나의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두야 가련다….」
나라잃은 겨레의 한을 노래한 그의 대표적 『떠나가는 배』는 지금도 많은 점은이들이 애송하는 명시다. 그는 1930년 순수시지인 『시문학』을 창간, 변영노, 김원식, 이하윤등과 함께 순수시운동을 전개, 한국시사에 소위 시문학파라는 문학적 분수령을 세웠다.
「서정의 고고한길」을 걸었던 그는 1938년5월 34세의 나이로 숨졌다. 「고향은 찾아가 무엇하리/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데/저녁 까마귀 가을풀에 울고/마을앞 시내도 옛자리 바뀌었을라」고 노래했던 그는 유명을 달리한후 고향(전남광산군)에 묻혔다.
충주박씨는 해방후 박우경 박흥규 박병배 박종태 박종율씨등 5명의 국회의원을 냈다.
학계에는 박하욱(공전·전전남대총장) 박병규(서울대 교수) 박시인(서울대교수) 박선우(서울대교수 박인식(서울대 교수)씨등이 활약하고 있다. 전국불교신도회장 박완일 전삼양사 부사장 박종면 석유공사부사장 박종율씨등도 돋보인다.

<집성촌|마을입구에 바마비 남아|일제땐 군수도 말서내려>
계룡산줄기 옥녀봉기슭에 1백20여호 충주박씨가 처마를 맞댔다.
입향조는 고려말엽 국정이 어지럽자 공주(현 대전시 규장동)로 낙향한 박진의 4대손 박희성과 희철형제. 선조 박진이 대전지역에 못자리를 잡았으니 후손들이 인근에 흩어져 산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10년전만해도 도안동은 충주박씨로 득실거렸단다. 사랑방에서 서른명이 모여 윷을 놀아도 할아버지, 아저씨 조카, 손자관계였다는 것.
박희성과 희철형제는 선조의 뜻을 받들어 벼슬에의 꿈을 버리고 옥녀봉 산그늘에 묻혀 음풍영월로 살았다. 마을 중앙에 지붕을 드리운 「둔파사」로 가는 골목 입구에는 아직도 이끼오른 하마비가 남아있다.
일제때만해도 군수들이 말을 타고 지나다가 「둔파사」앞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했다한다. 그러나 『요즘은 택시타고 가면서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박영선씨는 개탄한다.
마을앞 태봉들을 지나 도안동을 병풍처럼 둘러친 야산을 넘으면 산중턱 송림사이에 참의공 박진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추남북 일대 충주박씨들의 성역이다.
이 마을 박씨들은 일제가 이야산에 지하군수물자 창고를 설치하기 위해 묘자리철거를 명령했으나 끝까지 항거해 선산을 지켰다. 당시 문중일을 보던 박헌영씨(전 국회의원 박병배씨의 부친)를 선두로 박씨문중이 단합, 「충주박씨족보」를 내보이며 일본인 관리들과 대항했다는 것이다.

<지명인사>
▲박하인(전남대교수) ▲박종철(전남대교수) ▲박종율(전남대교수) ▲박종건(전남대교수) ▲박응철(중앙대교수) ▲박선부(한양대교수) ▲박우동(한양대교수) ▲박해근(충남댁수) ▲박은목(충남대교수) ▲박중근(한국과학원교수) ▲박한상(강원대교수) ▲박관경(종의전문대교수) ▲박하만(전광주향교전교) ▲박제완(전성규노간전학) ▲박삼근(협립우산사장) ▲박종익(감정원감사) ▲박우창(태평양화학중역) ▲박용옥(두산그룹중역) ▲박종달(실업가) ▲박규식(계림가구사장) ▲박연갑(실업가) ▲박문겸(운성관광사장) ▲박린근(실업가) ▲박윤희(교육사업가) ▲박종균(실업가) ▲박종갑(실업가) ▲박용근(전시장) ▲박제윤(전군수) ▲박종국(전군수) ▲박종만(전국회섭외국장) ▲박재도(전총리비서관) ▲박을희(전여군단장) ▲박상희(전고교장) ▲박하욕(전교육장) ▲박종규(전규육장) ▲박용석(전교육장) ▲박영철(전영사) ▲박현배(장중고교장) ▲박종무(교육장) ▲박병무(광주지검부장검사) ▲박제형(경찰서장) ▲박완기(철원군수) ▲박정욱(경전·한국투자신탁전산실장) ▲박하성(의전) ▲박재철(동) ▲박종대(동) ▲박치석(동) ▲박종진(동) ▲박종군(동) ▲박재경(동) ▲박종달(동) <종친회 제공·무순)< p>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