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다.’ 선거가 끝나면 유권자들 사이에선 이런 한탄이 나오곤 합니다. ‘최선은 아니어도 차악을 고르자’는 게 유권자들의 선거 목표가 된 지는 꽤 됐죠. 한데 선거가 끝나면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최악을 골랐는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기면서 ‘잘린 손가락들이 한강을 메웠다’는 자조적 유머가 나옵니다.
이번 이완구 국무총리 인준 과정을 보며 유권자로서 내 손가락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병역기피·부동산투기 의혹이나 위험한 언론관 같은 얘긴 귀 아프게 들었으니 그만두죠. 삼청교육대 참여로 훈장도 받고, 그 후에도 현란하게 당적을 바꾸며 언제나 승자편에 선 이악스러움도 일단 그의 실력이라고 치죠. 공자(孔子)가 사람을 가르는 기준으로 보면, 이는 전형적인 소인배의 실력이니 우리가 꿈꾸는 ‘군자(君子)의 정치’는 물 건너갔다는 허탈함이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한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를 뽑은 것은 우리 유권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를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다’는 국회의원도 우리가 뽑았죠. 또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뽑고 세금 내서 먹여 살리는 국회의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온통 친박·비박, 친노·비노로 갈려 옛 사색당파 싸움도 울고 갈 계파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친국민’ 국회의원, 국민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국회의원은 본 기억이 없습니다.
계파정치는 우리에게 ‘추한 현실’을 던져줬습니다. 새누리당은 총리인준 표결에 앞서 표단속을 했습니다. 비박 집행부가 총리 인준에 실패하면 정치적 부담을 지게 될까 봐 그랬다는 해석이 나오는군요. 이번 총리 인준을 보면 앞서 안대희·문창극 총리 후보가 왜 낙마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총리 기준을 확 낮춰 앞으로 총리는 아무나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리더십은 생뚱맞아서 부끄러웠습니다. 집권세력을 견제·감시한다는 야당이 어떻게 그리 적나라하게 저열한 수준을 드러내는지. ‘자진사퇴’ ‘여론조사’ 등 되는대로 막 던지더군요. 여론조사 뜻은 접었지만, 법으로 국회의원들이 청문회를 통해 인준하라고 했는데, 공을 여론조사에 돌린다면 국회는 뭘 하겠다는 겁니까. 여론조사 만능 정치는 위험합니다. 여론은 시시각각 변하고, 변수 하나만 틀어도 여론의 향방은 달라집니다. 여론이 곧 사회의 옳은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론조사는 지표로 활용해야지 결정요소로 삼으면 안 된다는 건 상식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왜 툭하면 여론조사인가. ‘민심을 따르는 정치인 코스프레’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부터 설 연휴입니다. 설 민심을 듣겠다며 ‘민심 정치인 코스프레’가 횡행하는 시즌입니다. 정치인마다 세배투어를 하고, 시장을 찾아 상인의 손을 잡고 귓등으로 고충을 듣곤 민심을 알았다고 큰소리 칠 겁니다. 그러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설 민심으로 정치가 바뀌진 않을 겁니다.
이제 유권자들도 ‘민심’으로만 존재해선 이 부패한 패거리 정치를 바꾸지 못할 것 같습니다. 민심이란 단지 방향성만 있고, 권력에 선처를 호소하는 식의 수직적 관계를 상정합니다. 원래 유권자와 정치인은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입니다. 유권자들은 단지 욕하고, 한탄하고, 하소연하는 ‘어린 백성’으로 남아선 안 됩니다. 자발적 시민성을 기반으로 이웃과 공동체를 살리고, 패거리 정치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찰하고 헌신하는 시민’이 되어야겠지요.
당파싸움에 몰두하던 조선왕조는 망했습니다. 시민정신이 없던 시대였죠. 그 뼈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 계파정치에 지고 새는 정치를 감시·견제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설 연휴, 나라를 살릴 시민정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