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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 우리가 그들에게 반한 시간 ① 정현목 기자가 꼽은 성찰의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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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 기자들의 특별한 인터뷰
설에는 가까운 사람들과 덕담을 나누며 서로의 복을 기원합니다. magazine M은 이번 설을 맞으며 독자 여러분께 어떤 인사를 전할까 고민했습니다. magazine M 기자들에게 가장 큰 자산은 매주 인터뷰로 국내외 영화계 주역들을 만나는 경험, 그 자체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진실한 말 한마디가 한 해, 아니 평생 마음에 담아둘 기억으로 남기도 합니다. 바쁜 하루하루에 지치다가도 그 소중한 기억이 일깨우는 메시지에 다시 힘을 얻고는 하죠. 독자 여러분께 그 귀한 기억을 나눠 드립니다. 을미년 한 해, 이 기억들이 때때로 여러분께 힘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양우석 감독 2015년 1월│98호] “‘국제시장’에 씌워진 부당한 누명을 벗겨주고 싶었다. 나 또한 피해자니까.”

‘국제시장’(2014)이 우파 영화란 매도를 받으며 1000만 관객 고지를 넘어서려던 때, 새로운 접근의 기획 기사를 쓰고 싶었다. 친한 영화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변호인’의 양우석(46) 감독과 ‘국제시장’의 윤제균(46) 감독이 만나 대담을 나누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얘기에 술자리에 있던 이들이 반색했다. “이야, 그거 이뤄지면 대박인데.” 다음 날 양 감독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했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까짓 거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온 양 감독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윤 감독만 괜찮다면 만나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윤 감독의 동의 하에 다음 날 대담이 이뤄졌고, 사회 통합적 메시지를 담은 두 감독의 대담 인터뷰가 magazine M과 중앙일보에 함께 게재됐다.

인터뷰를 마친 뒤 양 감독과 대구탕을 함께 먹었다. 그 자리에서 양 감독은 “사실 제가 윤 감독과의 대담에 응한 이유는요”라며 운을 떼더니, “‘국제시장’에 씌워진 부당한 누명을 벗겨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라고 했다. 양 감독 자신도 1년 전 ‘변호인’(2013)이 흥행할 때 ‘좌빨 영화’를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던 터였다. 영화가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색이 입혀지는 세태의 희생양이 됐던 그였기에, 윤 감독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양 감독과의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다. 영화가 영화 자체로 소비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이용되는 병리적 현상.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진영 논리에 의해 영화마저도 좌우로 나뉘어버리는, 우리 사회 갈등의 골은 또 얼마나 깊은 것인가.

[김용화 감독 2013년 8월│24호] “디지털 캐릭터의 성취감에 도취돼 관객 성향과 패턴 분석에 소홀했다.”

고릴라가 야구하는 얘기의 ‘미스터 고’(2013, 김용화 감독)는 총 제작비 300억원에 손익분기점이 670만 명인 대작이었다. 하지만 132만 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2013년 영화계 최대 이변으로 꼽힐 정도의 흥행 참패였다. 한국영화 기술력의 진화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결국 문제는 스토리였다. ‘미녀는 괴로워’(2006) ‘국가대표’(2009)를 흥행시킨 충무로의 대표 이야기꾼 김용화(44) 감독의 작품이었기에 아쉬움은 더욱 컸다. 그와의 막걸리 토크는 만남의 장소로 가는 발걸음부터 무거웠다.

인터뷰 섭외가 이뤄진 지 며칠 되지 않아 ‘미스터 고’의 흥행 실패가 기정 사실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김 감독이 막걸리 토크를 취소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 장소에 나왔고, 언제나처럼 진지한 태도로 질문에 답했다. “도대체 왜 실패했을까요?”란 질문으로 시작한 인터뷰는 영화 기자 일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 “디지털 캐릭터의 성취감에 도취돼 관객 성향과 패턴 분석에 소홀했다”는 냉정한 패인 분석에 나 또한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부모 모두 큰 병을 앓았던 탓에 대학(중앙대 영화과) 때 생선 장사, 막노동을 해야 했던 힘든 과거를 털어놓을 땐 내 눈시울까지 촉촉해졌다. 당시 ‘미스터 고’의 실패에 많은 기자와 영화인들이 가슴 아파했다. 감독 김용화뿐 아니라 인간 김용화를 응원하는 우군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자신이 만든 영화들만큼이나 따뜻하고 배려 깊은 그의 인간성 때문일 터.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인간은 끊임없이 위로받아야 할 존재”라는 평소 철학을 얘기해줬다. 그가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마이너리티들의 삶을 감싸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의 차기작은 동명 웹툰이 원작인 ‘신과 함께’다. 이번에는 기술적 성취 못지않게,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긴 스토리가 다시 빛을 발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정현목 기자, 사진=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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