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청소년’으로 불리는 소년·소녀 13명이 설을 앞두고 태국 북서부 치앙마이로 힐링 여행을 다녀 왔다. 천종호(50)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가 하나투어와 함께 마련한 ‘지구촌 희망여행’은 지난 8일부터 13일까지 6일간 이어졌다.
생애 첫 해외여행을 떠난 아이들은 모두 절도·폭행 등 비행을 저질러 소년보호처분을 받고 청소년회복센터(쉼터)에서 생활하는 중이다. 인솔자인 천 부장판사는 2010년 창원지법 소년부를 시작으로 5년째 소년재판을 전담하고 있다. 법정에서 아이들을 엄하게 꾸짖어 ‘호통판사’로 불린다. 그는 “비행 청소년들은 대부분 가정 형편이 어렵고 한 부모 가정이나 조손(祖孫) 가정 출신이어서 마음속에 상처가 많다”면서 “여행을 통해 스스로가 소중한 존재이고, 포기하기엔 이르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이들의 소감문을 바탕으로 여정을 재구성했다.
#힘겨운 첫걸음 : 열여덟 살 현지 이야기
지난 8일이었다.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부산 김해공항 국제선 카운터 앞에서 판사님, 아이들 14명과 처음 만났다. 그런데 출국 직전 한 아이가 “도저히 못 가겠다”고 울먹였다. 그 아이는 여행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최근 가족 문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 아이들도 입을 꾹 다문 채 스마트폰 게임을 하거나 계속 주위를 둘러봤다. 설상가상 비행기가 세 시간 연착됐다. 새벽 3시가 넘어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변화의 시작 : 열여덟 살 혜린이(가명) 이야기
태국에 도착한 첫날 우린 5m가 넘는 나무 위에 매달려 집라인(Zip Line·줄 타고 강 횡단하기) 체험을 했다. 안전 장비를 착용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결국 포기한 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다행히 이후의 뗏목체험, 코끼리 타기는 친구들 도움으로 무사히 마쳤다. 이런 내가 2년 전 분노 조절이 안 돼 자해를 하고, 쉼터 선생님에게 흉기를 휘둘러 10호 처분(소년원 2년 송치)을 받았다니….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다음 날 시내에서 1시간 떨어진 소수민족 학교에 가서 봉사활동을 했다. 여섯~열두 살 아이들을 3명씩 맡아 페이스페인팅, 축구 등을 하며 놀았다. “남을 도와주니까 어른이 된 것 같아요.” 나는 판사님께 수줍게 털어놓았다.
#위기 : 열여덟 살 현태 이야기
“너희들 계속 거짓말하는 거 판사님이 모를 줄 아나. 똑바로 못 대나!”
여행 둘째 날 밤. 우려했던 ‘사건’이 터졌다. 민혁이(17)가 나를 포함한 남자 아이들에게 담배를 팔았다가 판사님에게 들킨 것이다. 민혁이는 처음엔 “담배가 없다”고 버텼다. 판사님이 방에서 담배를 찾아내자 “공항 면세점에서 외국인에게 부탁해 한 보루 샀다”고 했다.
“너그들 여기 여행 왜 왔나. 잘못 반성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온 거 아니가?” 판사님 의 말씀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났다. 민혁이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앞으로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는 반성문 두 장씩을 쓰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천 판사님은 평소엔 다정하시다가도 장난이 심하거나 동행한 선생님들에게 버릇없이 굴 땐 호통을 치신다.
#아픔·힐링 : 열네 살 태근이 이야기
셋째 날과 넷째 날, 서로 조금씩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폭행과 오토바이 절도로 소년재판을 받았다. 가위만 있으면 어떤 오토바이든 시동을 걸 수 있다. 작년에도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나다 붙잡혀 5호 처분(보호관찰)을 받았다. ‘나이가 어리니까 풀려나겠지’ 했는데, 천 판사님은 소년분류심사원(선고 전까지 소년원 구금)으로 위탁했다.
“그때 자유가 없는 생활이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을 거예요.” 달리는 차 안에서 판사님께 말했다. 절도로 5호 처분을 받은 수현이(17) 형은 지난해 위탁 기간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수현이 형은 “그때를 떠올리며 다시는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다시 여행 : 열아홉 살 승우(가명) 이야기
태국에서의 마지막 날. 밤늦게 공항으로 갔다. “헤어지기 싫다”며 눈물을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지금까지 꿈이란 것도 없었고 하고 싶었던 것도 없었다. 차량 절도, 사기, 아리랑치기…. 나 자신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는 좌절감도 들었다. 판사님이 알려준 시바타 도요의 시 ‘약해지지 마’가 기억에 남는다.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여행은 끝이 났지만 우리 각자의 삶에서 진짜 여행은 지금부터다.
태국 치앙마이=이유정 기자
사진 설명
사진 1 천종호 판사와 함께한 6일간의 여행 동안 13명의 청소년들은 다양한 체험을 하며 매일 한 뼘씩 자랐다. 생애 첫 해외여행에서 코끼리를 타보고
사진 2 소수민족 학교에서 페이스페인팅과 축구 등 봉사활동도 했다.
사진 3 여행 후반부로 갈수록 아이들이 천 판사에게 먼저 다가가기 시작했다. 단체사진은 이들이 미성년자임을 고려해 모자이크 처리했다. 가운데는 천 판사. [사진 하나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