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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쳤으니 ‘억’ 하고 쓰러지라는 박상옥 청문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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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강수 사회2부
부장대우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11일 예정)는 열리지 않았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자진사퇴를 요구하며 보이콧해서다. 신영철 대법관의 임기가 17일로 끝나 그날 이후 대법관 결원 사태는 불가피해졌다.

 보이콧 이유는 단순하다. 박 후보자가 서울지검 검사로 있던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수사에 참여했고 이번에 국회에 임명동의안을 내면서 그 경력을 누락해 대법관 자격이 없다는 거였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와 조작에 관여한 주역”이라고까지 했다.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박군 고문치사사건은 28년 전 6·10민주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그 한 달 전 장세동 안기부장이 퇴진한 것을 두고 ‘죽은 박종철이 산 장세동을 쫓았다’고 했다. 그때 박 후보자가 뭘 했길래 지금 발목을 잡힌 걸까.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피해자는 박종철군과 대한민국 국민, 직접 가해자는 치안본부 고문 경찰관 5명, 축소은폐 지시자는 경찰 간부 4명, 배후는 군사정권 시절 안기부장, 내무·법무장관 등이 국정 운영 명분으로 가졌던 소위 ‘관계기관대책회의’다.

 그럼 검찰은 당시 뭘 했나?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1995년 출간)라는 책을 꺼내 다시 읽었다. 박군 부검 참관자이자 수사검사였던 안상수 창원시장의 일기체 고백록이다. 박군 수사는 1차, 2차, 3차(대검 중수부)로 이어졌다. 1, 2차 수사 때 실무지휘자는 정구영 서울지검장. 주임검사는 신창언 서울지검 형사2부장, 수사팀원은 안상수 수석검사, 이승구(특수부서 파견), 박상옥 검사(말석)였다.

 “초동 수사를 한 경찰은 조모·강모 경찰관 2명을 구속해 송치했다. 나는 조씨를, 박상옥 검사는 강씨를 조사했다. 2월 말 영등포교도소로 면회하러 갔다가 ‘범인이 3명 더 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즉시 수사계획서를 만들어 보고했으나 수사지시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박 검사는 여주지청으로 발령 났다. 3월 21일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안기부가 ‘나라를 위해 검찰이 양보하라’고 해 덮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게 검사인가 부끄러웠다.”(본문 중에서)

 박군 사건을 밀착취재해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법조출입 선배 기자에게 물었다. 검찰의 공과가 뭐냐고.

 “검찰이 비난받을 부분은 고문 가담 경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당장 수사를 못한 것이다. 그건 검찰의 뜻이 아니라 대책회의의 결정이었다. 검찰이 아니었다면 박군 사건은 진상이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

  사건 종결 이후 정 지검장은 검찰총장(90~92년)을, 신창언 부장검사는 94년 여야 의원들의 동의를 받아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냈다. 박 후보자가 지금 처한 상황과는 아귀가 맞지 않는다. 한 사람에게 ‘축소수사검사’라는 낙인을 찍으려면 근거가 명확해야 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탁’ 쳤으니 ‘억’하고 쓰러지라고 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나. 박 후보자에게 청문회를 허(許)하라.

조강수 사회2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