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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규의 한국미술명작선] ⑩ 문학이 그림으로 들어오는 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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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 이씨산방장서도(李氏山房藏書圖), 지본담채, 23.1×29.0㎝, 선문대 박물관 소장.

흔히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듯하다’는 말을 합니다. 시상이 절로 떠오를 듯한 서정적인 그림에 대한 찬사입니다. 그림에 이 말이 쓰인 지는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에 한 중국 사신이 가져온 화첩으로 인해 글이 그림이 되는 사실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이 화첩을 가져온 사람은 앞에서도 등장했던 명나라 사신 주지번입니다. 1606년 조선에 온 그는 선조에게 화첩 하나를 예물로 바쳤습니다. 그 화첩의 이름은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입니다. ‘천고에 더 이상 볼만한 것은 없으리라’라는 과장스런 제목을 단 화첩인테 과연 당시 조선에서는 그와 같은 화첩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어서 화제가 됐습니다.

내용은 예전부터 명문장으로 이름난 문인들의 글과 시를 소재로 명나라 궁중화원들이 화려한 채색으로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이 된 글과 시가 20편이어서 이 화첩에는 20점의 그림이 이들과 짝이 되어 그려져 있었습니다. 글과 시는 대부분 조선 문인들도 줄줄 외고 있는 『고문진보』나『문선』에 수록돼 있는 유명한 것들입니다.

기록을 보면 고려 때부터 그림을 보고 시를 짓는 일은 흔히 있었습니다. 또 시를 읊으면서 그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린 예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문장 여러 편을 그림으로 그려 화첩을 묶은 사례는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이 화첩은 임진왜란 직후이기는 했지만 그림을 좀 아는 문인들 사이에 대단한 화제가 됐습니다. 글과 시가 그림이 된다는 희한한 사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화첩은 선조의 허락 아래 허균의 형인 허성의 주도로 당시 최고화가로 손꼽히던 이징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 모사본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사 화첩은 왕족인 이정영이 소장했습니다. 이외에 선조는 궁중 화원을 시켜 또 다른 모사본을 만들어 당시 중국사신 접대를 담당했던 유근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하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지번이 가져온 『천고최성첩』은 조선화가가 그린 모사본 두 첩이 민간에 전하게 된 것입니다. 궁중소장 화첩은 당연히 사람들이 함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진 모사본을 당시 명사들이 돌려가며 감상했고 더러는 사비(私費)를 들여 자신만의 복사본까지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제작된 조선판 『천고최성첩』은 상당한 수에 이르렀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만 7본이나 됩니다.

이 화첩은 유명 문장이나 시가 그림이 되는 과정을 실례로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화첩이 여러 본 모사되면서 유행하는 과정은 이후 18세기 후반에 대유행을 하는 시의도(詩意圖) 전개에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시의도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 한시를 소재로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이광사의 ‘이씨산방장서도’ 역시 당시 유명인사가 『천고최성첩』을 모사한 과정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 그림은 아래쪽에 늙은 학자가 젊은 선비의 도움을 받으며 돌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다리 건너 숲길을 빠져나가면 산골짜기에 집에 몇채 보입니다. 개중에는 이층 누각도 있는데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집안에는 모두 책들이 가득합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글은 소식(蘇軾·1037∼1101)이 지은 명문장으로 유명한 ‘이군산방기(李君山房記)’입니다. 글은 ‘상아, 물소 뿔, 진주, 옥 같은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사람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기는 하지만 쓰임에는 적합하지 않다’로 시작하면서 ‘공자님 같은 성인께서도 학문은 반드시 책을 보는 데서 시작하였다’며 열심히 독서할 것을 권하는 내용입니다.

소식의 친구인 이상(李常)은 젊어서 여산의 오로봉 밑 백석암에서 공부한 뒤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그리고 관리가 돼 떠나가면서 9000여 권의 장서를 그곳에 남겨 놓았습니다. 후학들은 이 책으로 공부를 하면서 그가 머물던 암자를 이군산방으로 이름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식이 친구를 떠올리며 자신은 이제 늙고 병들어 세상에 더 이상 쓰일 데가 없게 됐으니 이군산방에나 들어가 책을 읽으며 노년을 보내고자 한다는 내용을 글로 지은 것입니다.

그림과 글을 대조해보면 그림 속에서 다리를 건너는 늙은 선비는 소식이며 계곡 안쪽에 책이 꽉 찬 집은 이군산방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우람한 바위로 이뤄진 산봉우리는 여산의 오로봉입니다.

이광사는 화가이기보다는 서예가로 유명합니다. 또한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화가들과도 교류하며 직접 그림도 그렸는데 그 중에 당시 문인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천고최성첩』에 나온 내용을 다시 그려본 것입니다. 물론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기에 그림 옆에 당연히 ‘이군산방기’가 유려한 필치로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시대 후기에 유명 문장, 유명 시구가 본격적으로 그림으로 그려지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작자미상, 『중국고사도첩』 중 ‘이군산방도’, 1670, 저본채색, 27.0×30.7㎝, 선문대 소장.

이광사(李匡師·1705∼77)

조선후기의 문인이자 서예가로 유명합니다. 자는 도보(道甫)이며 호는 원교(圓嶠)입니다. 대대로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지만 소론이었던 이유로 당쟁 속에서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본인은 51살 때인 1755년 조정을 비방하는 나주 괘서사건에 연루되면서 종신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이후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8년 뒤에는 진도를 거쳐 신지로 옮겨져 그곳에서 결국 23년에 걸친 유배 생활을 보내며 끝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서예가로서 『원교필결』란 이론서를 저술하며 원교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했습니다. 그의 서체는 중국 영향 아래 있던 서체를 토착화한 것으로 동국진체(東國眞體)로 불리었습니다. 그는 그림에도 솜씨를 보며 현재도 10여 점의 그림이 전합니다. 두 아들 중 첫째는 실학자 이긍익이며 둘째는 서화에 솜씨를 보인 이영익입니다. 간송미술관에 전하는 대폭의 잉어 그림은 유배지를 따라다녔던 둘째 이영익이 부친이 잉어 머리만 그려놓았던 것을 20년 뒤에 꺼내 완성한 그림으로도 유명합니다.

글=윤철규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 ygado2@naver.com
한국미술정보개발원(koreanart21.com) 대표. 중앙일보 미술전문기자로 일하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과정에서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역서 『완역-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추사 김정희 연구』 『이탈리아, 그랜드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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