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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의 ‘보그병신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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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머스큘러하고 텐션이 있는 보디라인을 살려주는 퍼펙트한 써클 쉐입, 버닝하는 열정을 보여주면서 잔근육 같은 디테일이 살아 숨쉬는 템테이셔널, 클리어한 뷰를 보여주면서도 단단하고 탄력 있게 벌크업….’

 분명 한글로 쓰여 있는데도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 문구는 올 초 서울 지하철 9호선 일부 객차 안에 등장한 기아차 프라이드의 광고카피다. 광고카피란 특정 상품을 소비자에게 팔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상업적 글쓰기다. 그런데 이 광고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인지는 뒤로하고, 대체 무슨 뜻인지 해독조차 하기 어렵다. 보는 이를 하도 황당하게 만들다 보니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엔 이 광고를 조롱하는 내용이 진작부터 적지 않게 오르내리고 있다. 광고주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벌써 한 달 넘게 지하철 광고판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지만 말이다.

 혹시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걸까. 광고를 만든 광고대행사 이노션에 배경을 물었다. 이노션 관계자는 “프라이드의 주 타깃인 2025를 공략하기 위해 원래 ‘보그’나 ‘멘즈헬스’ 같은 잡지용으로 만든 광고”라며 “만약 문제가 된다면 지하철에서 당장 광고를 내리겠다”고 했다.

 역시 답은 ‘보그병신체’에 있었다. 2~3년 전 만들어진 이 신조어는 세계적인 패션지 ‘보그’에다 비속어 ‘병신’을 결합한 말로, 한글 대신 영어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쓰고 조사만 갖다 붙인 문체를 일컫는다. 보그를 비롯해 라이선스 패션잡지 한국어판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글쓰기를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고 해서 누군가 붙인 이름이다. 지하철의 프라이드 광고카피가 이런 ‘보그병신체’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보그병신체’를 비웃어도 패션업계 사람들은 소위 ‘있어 보인다’며 어설픈 영어를 열심히 가져다 써왔다. 그리고 이제 ‘보그병신체’가 패션에 관심 있는 일부 사람만 찾아보는 ‘보그’ 안에 머물지 않고 서울시민이 누구나 보는 지하철 광고판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특정 기업이 자사 제품 광고에 ‘보그병신체’를 쓰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상품 판매 수단을 넘어 우리 사회 안에서 갈수록 커지고 있는 광고카피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일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광고카피는 트렌드를 발 빠르게 포착할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사회적 변화까지 이끌어낸다. 10여 년 전 앞만 보고 달리던 한국인들에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며 가슴을 울리던 현대카드의 광고카피처럼 말이다.

 프랑스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는 광고를 “시의 영역”이라고 했다. 자본주의의 시(詩) 광고에서 더 이상 ‘보그병신체’를 보고 싶지 않다.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