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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칼럼] 초저금리 시대, 투자의 촉 세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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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객원기자

금융자산은 크게 나눠 두 가지다. 하나는 은행 예·적금 같은 저축상품이고 또 하나는 주식·펀드 등의 투자상품이다. 이론적으로 이들 상품은 시소를 타듯이 반대방향으로 움직인다. 동력은 금리다.

저금리 시대다. 그것도 금리가 1%대로 ‘초(超)’자가 하나 더 붙는다. 초저금리이니 저축상품으로 기울었던 시소에서 투자상품 쪽이 움직일 차례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투자상품으로 돈이 움직이는 게 안보인다. 그냥 은행에 머물러 있거나 가계의 금고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갈 곳을 잃어 시중에 떠돌아 다니는 단기 부동자금은 지난해 11월말 현재 791조3768억원으로 사상 최대다. 금리가 떨어지면 돈이 증시로 몰릴 것이란 전문가들의 예상은 현재로선 빗나갔다.

돈이 부동화하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경제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경제성장률은 자꾸 떨어지고 소득은 몇 년 째 제자리걸음으로 소비도 움츠려 들고 있다. 경제의 거울인 증시도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이니 돈의 속성상 복지부동할 수밖에. 그러나 복지부동은 납작 엎드려 기회를 엿볼 뿐이지 완전히 죽어 지낸다는 뜻은 아니다. 여건만 주어지면 순식간에 활동을 재개하게 돼 있다.

증시는 숲보다 나무

증시란 숲은 분명 침체에 빠져 있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다. 헬스케어같은 신성장주는 전반적인 장세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각개약진하고 있다. 일찌감치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주식을 털어낸 펀드들은 높은 수익률을 뽐내고 있다. 중소기업·벤처회사가 상장된 코스닥시장은 7년만에 600선을 돌파했다. 시장의 변화에 재빨리 대응했다면 수익은 내 손안에 있다. 적어도 증시만큼은 숲보다는 나무를 보라는 역설이 통한다. 전체 분위기에 우왕좌왕하지 말고 되는 주식을 골라내는 투자의 촉을 갈고 닦으라는 메시지다.

우리나라 투자자들에겐 투자 손실의 트라우마가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주식·펀드 투자자들 상당수가 손을 털고 나갔거나 손실을 끌어안은 채 시장이 좋아지는 날만 기다리며 속을 태웠다. 그러나 주가는 박스권이란 답답한 터널에 갇힌 채 빠져나올 줄 모른다. 투자한 지 수 년이 지나도 손실 회복의 길이 보이지 않자 시장은 위험하다는 선입견이 머리 속에 깊이 박혔다. 투자심리도 꽁꽁 얼어붙었다. ‘안전빵’인 은행 상품에 돈이 몰린 건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나라 가계 금융자산의 45%는 현금·예금이고, 25%는 투자상품, 29% 보험·연금이다. 현금·예금이 12%, 투자상품 54% 정도인 미국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의 투자상품 비중은 2007년만 해도 35% 가까이 됐다. 증시의 장기 침체에 질린 개인들이 그만큼 시장을 떠났다는 뜻이다. 개인들은 저금리가 본격화한 2009년부터 지금까지 30조원이 넘는 주식을 순매도했다.

그런데 미국도 한때는 가계 금융자산이 은행 예금 위주였다. 1975년만 하더라도 그 비중이 55%로 지금의 우리나라보다 높았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들어서면서 투자상품 비중이 올라가는 쪽으로 달라졌다. 배경은 저금리였다. 1980년대 초 미국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12% 정도였는데, 80년대 중반 3~4% 수준으로 떨어졌다. 각 가정은 줄어든 이자수입을 메우기 위해 해외 투자에 나서거나 주식 또는 펀드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저금리가 지속된 일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돈이 은행에서 빠져 나와 투자상품 쪽으로 물꼬를 텄다. 대신 일본은 안전성에 집착하는 특유의 성향 탓인지 주식보다는 채권을 선호했다. 아울러 싼 이자로 엔화를 빌려 해외 자산을 사들이는 ‘엔캐리 트레이드’에도 나섰다.

이들 선진국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저금리 시대에 돈의 서식지는 투자자산일 수밖에 없다. 은행 예금을 그냥 깔고 앉아 있다가는 자산을 늘리려는 꿈은 접는 게 좋다. 요즘처럼 금리 1%대의 초저금리 시대엔 은행예금은 물가상승을 감안할 때 오히려 마이너스 수익률이다. 금리 하락기에 필요 자금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살펴보자. 아인슈타인이 창안한 ‘72법칙’은 원금을 2배로 늘리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간명하게 가르쳐 준다. 예컨대 1억원을 3%의 수익률로 굴려 2억원을 만들려면 24년이 걸린다. 24년은 72를 3으로 나누어 구한 값이다. 만약 수익률이 1%로 떨어지면 그 기간은 무려 72년으로 늘어난다. 그러니까 필요 자금을 원하는 기간 내에 만들려면 수익률을 올리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다. 그건 투자상품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투자위험은 세월이 약

우리나라 사람은 일본인보다 투자DNA가 발달돼 있는 편이다. 보다 공격적이고 위험수용적인 국민성만 보더라도 그렇다. 1997년 외환위기를 벗어나게 한 벤처 투자붐이라든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보였던 다양한 포트폴리오 투자법은 이 DNA가 잘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트라우마에 갇혀 잠자고 있을 뿐이지 일단 깨어나기만 하면 주식과 펀드 투자에서 공격적 성향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투자 수익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높은 수익을 원할수록 대가가 커진다. 은행 예금이나 적금은 이자를 꼬박꼬박 주기 때문에 대가를 치르고 말 것도 없지만 투자자산은 그렇지 않다. 수익이 좋다고 덥석 물었다간 된통 당할 수 있다. 무엇보다 원금이 깨질 수 있다는 게 가장 뼈아픈 대목이다. 투자는 위험하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하지만 위험이라는 건 시간 앞에서 나약해진다. 세월이 약이 듯이 위험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맹렬함이 눈 녹듯이 사라지게 돼 있다. 투자자산은 원금 손실 가능성이란 리스크 떠안아야 하고 그게 싫으면 시간 속에 묻어 두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길게 보고 투자하는 것이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10년 동안 보유하지 않을 주식이라면 단 10분도 가지고 있지 말라”고 말했다. 버핏은 IT주식은 거의 사지 않고 전통 굴뚝주에 승부를 거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식을 잘 모르는 한 지인의 이야기다. 지난 해 연말 정년 퇴직한 그는 퇴직 이후가 별로 걱정 안 된다고 했다. 그동안 꾸준히 사모은 주식 때문이다. 그는 입사 직후 회사에서 종업원 사기진작을 위해 신협통장에 매달 넣어주는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쌓이면 없는 셈치고 주식을 샀다. 면밀히 종목을 분석하는 과정도 없이 당시 인기가 있는 대중적인 주식이라면 무작정 샀다. 예를 들면 1990년대 증권주, 2000년대 초반엔 IT주 이런 식이었다. 한번 사놓은 주식은 절대 팔지 않고 끝까지 갔다. 그렇게 하기를 28년. 보유 종목마다 부침을 심하게 겪었다. 어떤 종목은 부도를 맞아 휴지조각이 됐는가 하면 어떤 것은 수백 배의 수익을 남겼다. 전체적으론 원금의 10배 가까운 수익이 된다고 한다. 그는 "한국경제는 부침을 겪겠지만 계속 성장해 나갈 것으로 믿었다"며 “주식보다는 한국경제에 베팅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장기보유와 분산이 투자 위험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위험회피 방법을 이용한 셈이 된 것이다.

서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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