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정경민의 시시각각

사이렌의 달콤한 유혹, 디플레이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정경민
경제부장

민방위훈련 때마다 귀청을 째는 소음을 내는 사이렌. 그러나 본래 어원은 전혀 달랐다. 거친 파도가 치는 벼랑 끝에서 리라(고대 악기)를 켜며 노래를 부르는 그리스신화의 요물이 사이렌이다. 달콤한 노랫가락은 뱃사람들의 넋을 빼앗았다. 짙은 안개 너머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바위절벽을 향해 배는 돌진했다. 아차 하는 순간 뱃사람들은 사이렌의 웃음소리와 함께 검은 바다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최근 우리 주변 곳곳에서도 달콤한 노랫가락이 들린다. 한 피자업체는 한 판에 9900원짜리 피자로 대박을 냈다. 일주일 동안 2초에 한 판씩 15만 판을 팔았다. 화들짝 놀란 패스트푸드점들도 2000원짜리 아침을 앞다퉈 내놨다. 연말연초 매출을 죽 쑨 백화점들은 3000억원대 명품세일 대전을 준비 중이란다. 소비자로선 어깨춤이 절로 난다.

 그런데 어쩐지 꺼림칙하다. 자꾸 1990년대 초 일본이 떠오른다. 엔고 거품 붕괴로 소비가 얼어붙자 가격인하 전쟁이 불붙었다. 100엔 숍도 나왔다. 이젠 낯익은 ‘가격 파괴’란 용어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일본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물가상승률이 2년 연속 1%대로 기다 마이너스로 떨어지자 ‘착한 디플레이션’이라고 칭송했다. 전후 고도성장기를 거친 일본인들로선 물가 하락이 은총이라면 모를까 재앙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게다. 신고전파 주류경제학 교과서도 물가와 소비는 반비례한다고 가르쳐왔다. 물가가 떨어지면 소비가 살아난다는 공식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자연의 법칙처럼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제였다. 서민으로서도 물가가 떨어진다는데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후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이 그 반대인 인플레이션보다 위험한 건 이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은 당장 서민 가계부에 주름을 지운다. 고통이 피부에 와 콱콱 박힌다. 이와 달리 디플레이션은 사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달콤하다. 싫증나지 않는다. 디플레이션 우려는 양치기 소년의 허풍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유권자가 흥겹다는데 판 깨고 나설 정치인이나 관료가 나올 리도 만무하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 동안 냉·온탕 정책을 오가며 실기(失機)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물가와 소비가 반비례한다는 주류경제학 이론이 미처 진단치 못한 고질병에 걸려 있었다. 바로 베이비부머 세대의 퇴직 쓰나미와 고령화다.

 90년대 후반 일본을 휩쓴 가격 파괴 열풍의 이면엔 ‘단카이세대(團塊世代)’로 불리는 베이비부머의 퇴직 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패전 직후인 47~49년 태어난 단카이세대는 수명도 갑자기 늘었다. 장래가 불안해진 건 당연하다. 금리조차 뚝뚝 떨어졌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소비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미래를 고사시키는 독배가 됐다. 가격 파괴 바람이 거셀수록, 금리가 떨어질수록 소비가 늘기는커녕 더 위축되는 ‘경제학의 역설’이 벌어진 이유다. 더욱이 이 늪은 한 번 빠지면 어지간해선 헤어나기 어렵다. 정부가 아무리 돈을 퍼부은들 미래에 대한 베이비부머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달랠 순 없어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쩌면 이와 꼭 닮았는지 소름 끼칠 정도다.

 딱 한 장 우리가 더 가진 카드가 있다면 후발주자란 이점이다. 물가 하락에 박수만 쳤던 일본의 말로가 어땠는지 지켜봤다. 단지 돈 풀고 금리 낮춘다고 사이렌의 저주에서 깨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퇴직 후에도 은퇴하지 못하고 30년 이상 구직시장을 헤매야 하는 ‘반퇴(半退)시대’가 이미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1차에 그친 일본의 단카이세대와 달리 우리 앞엔 2차, 3차 베이비부머 퇴직이 기다리고 있다. 본격적인 퇴직 쓰나미가 덮치기 전에 대비하지 않으면 일본보다 더 혹독한 고난의 행군을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정부든, 기업이든, 가계든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경민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