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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시대공감] 우리가 프랑스의 자유를 아는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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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호 31면

지난 한 달 동안 파리에서의 테러와 그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반응을 지켜봤다. 표현의 자유라는 공화주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사회적 소외 문제 등 취약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반성이었다.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한국의 반응이었다. 대중의 무관심 속에 수많은 논객이 프랑스에 대한 뜨거운 비판을 쏟아냈다.

프랑스라는 ‘강자’의 표현의 자유보다는 이슬람 ‘약자’의 종교 및 정체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화적으로 체면을 중시하는 동양 사회에서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풍자의 전통은 생소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서방의 제국주의나 지배력에 대한 반감인 듯하다.

프랑스에서 시민적 자유와 종교의 관계는 수백 년 전부터 지속적 논쟁의 대상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아무런 장벽이 없다는 의미인가, 완전한 자유는 존재하는가, 평등은 자유를 위협하는가, 모든 신앙은 이성에 반대되는가…. 이건 철학가들의 논쟁이 아니라 대학입시 시험을 치르는 고등학생들이 최근 몇 년 동안 다뤘던 주제들이다.

표현의 자유란 프랑스가 전통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논쟁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합의라는 말이다.

서방 사회는 강자고, 이민자는 약자라는 틀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은 매우 복잡하다. 우선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 자신의 신념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강자의 오만으로 속단하기 어렵다. 다수의 온건 이슬람 지도자들은 중동이나 북아프리카가 아니라 프랑스가 이슬람을 믿기에 가장 좋은 나라라고 한다.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고, 이슬람 버전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또 프랑스에는 무슬림이라고 간주하는 집단이 수백만이지만 유대인은 수십만이다. 강자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슬람을 하나로 묶어 버리는 사고는 전체주의다. 프랑스에는 500만의 무슬림이 있다는 주장이 자주 반복된다. 하지만 북 또는 서아프리카 출신이라고 다 무슬림이 아니다. 서아프리카 출신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에 맹렬하게 적대적이다.

게다가 무슬림이라고 전부 마호메트의 캐리커처에 상처를 받지도 않는다. 전단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잡지는 안 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공화주의 무슬림도 무척 많다.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와 유머를 공유하는 신도도 있다. 무슬림이라는 딱지를 떼어 버리고 싶은 여성도 대단히 많다. 피상적인 제국주의와 식민지, 강자와 약자, 공격자와 피해자라는 프레임으로 약자 집단을 대변하거나 다른 사회를 손쉽게 비난하는 것은 무리다.

인간을 집단의 소속원이 아니라 독립된 개인으로 보는 공화주의의 장점을 부정해선 곤란하다.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은 한국 입양아 출신이다. 같은 인종 집단이 지지해야 성공하는 미국이라면 어려운 일이다. 공화주의 정신 덕분에 젊은 이민자나 이민 2세 가운데 40~80%가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커플을 형성한다. 지난 보름 동안 만난 친구를 조사해도 50~60%는 다른 인종 집단과 어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처럼 같은 인종 집단끼리 어울리는 ‘게토화’ 현상은 덜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현재 논의되는 해결책은 공화주의의 포기나 변화가 아니라 강화이며, 이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한 교육과 의무적 공익 봉사를 고려 중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모든 종교의 신성함을 완벽히 보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런 천국이 어디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그나마 프랑스 사회는 종교 부문을 포함해 소수나 약자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현존’ 사회다. 각 사회는 자신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균형을 찾으려 노력한다.

현재 한국에 필요한 것은 먼 나라 제국주의 비판이 아니라 우리나라 개인 자유의 확보다. 내가 불편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참아야 나도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사형 폐지가 극악한 범죄자의 생명도 보호하지만 인권을 중시하는 사회의 척도로 등장했듯이 사상과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때로는 상처를 주고 부작용을 낳는다 하더라도 민주사회 보편 원칙으로 실천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예외를 두어 자유를 제한하자는 자신의 주장은 항상 정당해 보이지만 ‘예외의 악용과 남용’은 너무 쉽게 자유를 말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사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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