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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그 시절 내 마음 동하게 한 70년대 주크박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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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호 30면

작사가가 꿈이었던 적이 있다. 제아무리 유명한 소설가가 된다 한들 내 작품을 통째로 외워줄 이는 없을 테니까, 이왕이면 내 가사를 온전히 곱씹어줄 노래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힘겹게 쓴 한 줄 한 줄이 그대로 사장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스무 살 그 시절에는 부던히 끄적였다. 풋사랑에 실패해 술잔에 눈물이 고일 때도, 무사히 동아리 행사를 마치고 기쁨에 벅차오를 때도.

김현석 감독의 새 영화 ‘쎄시봉’

아마 김현석 감독도 그랬던 것 같다. 2010년 MBC 예능프로그램 ‘놀러와’에 출연한 쎄시봉 멤버들을 보고 영화를 구상했다는 걸 보면 말이다. 그는 당대를 풍미한 뮤지션 개개인의 삶보다는 그들이 부른 노래의 속살에 집중했다. 어떤 상황에서 이 노랫말이 탄생했을까. 과연 이 가사는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이 노래에서 저 노래로 이어지는 사이 이들은 어떤 일을 겪었을까. 5일 개봉하는 영화 ‘쎄시봉’의 주인공인 뮤즈 민자영(한효주)과 제3의 멤버 오근태(정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김 감독이 직접 선곡한 주크박스는 1967년 대한민국을 달군 무교동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장발과 잠자리 선글라스, 미니스커트 등 깨알 같은 디테일도 살아있다. 이야기는 노래를 타고 그럴듯하게 연결된다. 사랑에 빠진 근태는 친구 이장희(진구)의 곡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빌려 마음을 고백한다. 영화를 찍으며 기타를 처음 잡아봤다지만 정우가 조심스레 읊조리는 멜로디는 그대로 관객 입에도 옮아붙는다.

연극과 뮤지컬에서 갈고 닦은 배우들의 노래 실력은 실존 인물과의 싱크로율을 높였다. 송창식(조복래)은 ‘담배가게 아가씨’로 자영을 연모하는 친구들이 경쟁하는 모습을 풀어낸다. 조복래의 구성진 목소리가 이놈 저놈 차이는 모습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웃음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압권은 강하늘의 노래 실력. 진짜 윤형주와 선보인 듀엣 CM송에서 누가 더 미성인지 가려내기 힘들 정도다. 세 명의 하모니가 처음으로 어우러지는 ‘백일몽’을 듣고 있노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제작비가 모자라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라는 미국 민요에 김 감독이 직접 가사를 붙인 곡이다. 사랑은 한 순간의 꿈이라. 수많은 히트곡을 담아내느라 저작권 사용료만 6억 원이 들었다지만 적재적소에 배치된 곡들은 제값을 톡톡히 한다.

아쉬움은 노래나 연기가 아닌 시간에서 나온다. “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 코니 프랜시스의 밝은 원곡과는 사뭇 다른 구슬픈 ‘웨딩 케이크’가 흘러 나오면서 극의 흐름은 단절된다. 떠나가는 사람도, 홀로 남은 사람도 분명 존재하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이다. 트리오 쎄시봉은 근태의 탈퇴로 트윈 폴리오가 되고, 탄탄했던 화음이 무너지면서 이야기는 극중 서울과 LA의 거리 만큼이나 퍼져버린다.

스무 살 곱게 쌓아올린 청춘의 싱그러움은 마흔 살 신파가 되어 나타난다. 근태(김윤석)와 자영(김희애)은 미국 LA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오열하지만 관객은 갈 곳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감독은 “너무 편의적인 것 같아 교차 편집을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인물은 물론 뒤바뀐 시공간을 그대로 쫓아 감정을 유지하기가 쉽진 않다.

떠오르는 이가 너무 많은 것도 함정이다. 극중 오근태는 트리오 쎄시봉의 원년 멤버였던 이익균씨와는 전혀 다른 가상의 인물임을 밝혔지만 젊은 관객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헷갈린다. 자영의 모습에서는 배우 윤여정이 겹쳐지기도 한다. 감독은 “뮤즈와 친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윤 선생님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힌트를 얻는 정도였다”고 선을 그었다.

허나 관객의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연상법은 이 영화에 독이자 득이 될 듯하다. “우리도 스무살이었던 적이 있다”로 열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라며 닫는 내레이션은 나만의 상념에 빠지기 딱 좋은 주문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말에 설레지 않는 이가 없었던 것처럼. ‘광식이 동생 광태’ ‘시라노 연애조작단’ 등을 통해 스크린의 로맨티스트로 자리매김한 김현석 감독의 작품이니 아기자기한 매력만큼은 기대해도 좋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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