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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양현석·구준엽 보면서 꿈 키웠다" … 춤꾼들의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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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드라마 ‘문나이트90’의 한 장면. [사진 엠넷]

‘서태지와 아이들’의 양현석과 이주노, ‘클론’의 강원래와 구준엽, ‘듀스’의 이현도와 김성재, 현진영, ‘영턱스클럽’의 최승민….

 1990년대 댄스뮤직의 스타들은 데뷔 전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였다. 함께 밤을 불사르며 춤을 췄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서다. 서울 이태원 ‘문나이트’. 당대 춤 좀 춘다는 댄서들은 여기를 거쳐 갔다. 지금은 전설로 남았지만 말이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32-3번지. 좁다란 먹자골목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4층짜리 붉은색 벽돌건물이 보인다. ‘MOON night’라고 쓰인 붉은 전구의 허름한 간판이 없었다면 이곳이 그곳인 줄 몰랐을 것이다. 이 건물의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에 문나이트 터가 나온다. 영턱스클럽의 최승민은 “20여 년 전 매일 이곳에 출근도장을 찍었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술 먹고 부킹하는 일반 댄스클럽이 아닌, 확실히 다른 곳이었다”고 기억했다.

 시계 침을 그때로 돌려 보자. 어느 주말, 500명도 넘는 사람이 264㎡(약 80평) 남짓한 클럽을 가득 메운다. 한창 물오르는 오전 3~4시면 어김없이 춤판이 벌어진다. 현진영·양현석·미애 등 당대를 주름잡던 댄서들이 스테이지에 오른다. 이들의 춤을 구경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힙합그룹 피플크루의 리더 조형일도 그중 하나다. “나도 춤으론 한가락 한다고 자부했는데, 문나이트에 처음 간 날 현진영의 댄스를 보는 순간 넋이 나가 버리더라.”(조형일)

 내로라하는 90년대 댄스가수들은 문나이트 키즈였다. 태초엔 박남정이 있었다. 문나이트에서 댄스 실력을 자랑했던 그는 88년 가요계에 데뷔한 뒤 백댄서팀인 ‘박남정과 프렌즈’ 멤버들을 문나이트에서 찾았다. 바로 양현석·박철우(‘R.ef’) 등이다.

 ‘서태지와 아이들’도 문나이트의 세례를 받았다. 시나위를 탈퇴해 작곡에 전념하던 서태지는 양현석에게서 춤을 배웠다. 양현석은 한 방송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춤을 전혀 몰랐던 서태지에게 일단 문나이트로 가라고 했다. 서태지가 거기서 춤꾼들을 한 달이나 지켜봤다. 그러고 나서 나를 다시 찾아와 춤을 배웠다.”

 최승민은 “양현석 선배의 눈에 들기 위해 죽어라 춤을 췄다. 지금으로 말하면 오디션이 문나이트 스테이지에서도 진행됐다”며 “양 선배 앞에서 춤을 추다 너무 긴장해 떨었던 기억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이주노는 양현석과 함께 문나이트의 양대 산맥이었다. 양현석은 힙합댄스를, 이주노는 브레이크댄스를 췄다. 스타일이 다른 만큼 두 사람 사이엔 미묘한 신경전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92년 양현석과 이주노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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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진영은 문나이트 인맥의 또 다른 핵심이다. 그는 89년 막 제작자로 나선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이 처음 발굴한 가수였다. 현진영은 90년 ‘야한 여자’로 데뷔했다. 그의 백댄서팀 이름은 ‘현진영과 와와’. 와와 1기는 경기고 동창인 구준엽과 강원래였다. 이후 두 사람이 군입대한 뒤론 이현도와 김성재가 와와 2기로 발탁됐다. 와와 3기엔 지누션의 션이 있었다. 이들 모두 문나이트 출신이다.

 이수만 회장은 문나이트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요계 전체가 문나이트를 주목했다. ‘듀크’ 매니저 출신인 환엔터테인먼트 신대호 대표는 “신인 가수를 찾으려고 매일 문나이트를 갔다”고 말했다. ‘철이와 미애’의 신철, ‘룰라’의 이상민과 신정환, ‘쿨’의 이재훈, ‘터보’의 김정남, ‘DJ DOC’ 정재용, ‘H.O.T.’의 문희준도 90년대 문나이트에서 볼 수 있었다. 백댄서팀까지 말하면 그 리스트는 더 길다. 연예기획사 대표로 변신한 최승민은 “문나이트 계보를 빼고는 90년대 한국 댄스음악의 역사를 쓸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양현석·이주노 급의 톱댄서들이 스테이지를 비우면 바로 댄스 배틀이 열렸다. 각지에서 온 댄서들은 남몰래 갈고닦은 춤 실력을 문나이트에서 겨뤘다. 조형일은 “어지간한 춤 실력으로는 스테이지에 올라갈 엄두를 못 냈다”고 말했다. 춤을 추기 위해 댄서들은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최승민은 “대부분 집이 이태원과 멀었다. 대중교통이 마땅치 않아 문나이트가 오후 11시에 문을 열기 전 미리 가 기다렸고, 끝나면 새벽 첫차를 타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차를 기다리며 춤 연습을 하다 길에서 잠드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춤으로 문나이트를 한번 제패해 보겠다’는 꿈들을 다들 꿨다”고 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는 것이다. 비보이팀 원웨이크루의 리더 김근서는 “문나이트는 냄새나고 허름하고 작은 클럽이었지만 양현석·강원래·구준엽·미애의 춤을 보면서 꿈을 키웠던 곳”이라고 말했다.

 문나이트에서 첫선을 보여 인기를 얻은 춤은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퍼졌다. 대표적인 게 90년 토끼춤이었다. 이후 브레이크댄스와 뉴 잭 스윙, 힙합과 같은 장르의 춤이 문나이트에서 먼저 유행했다. 문나이트는 한국 댄스의 대표였다. 미국의 유명 댄서 페리는 90년대 초반 문나이트에서 춤을 춘 인연으로 지금은 양현석의 YG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로 활동한다. 93년 당시 ‘대만의 서태지와 아이들’로 불렸던 ‘LA 보이즈’가 방한했을 때 문나이트를 들렀다. 여기서 구준엽과 김성재의 현란한 춤 실력에 입이 딱 벌어졌다는 후문이다.

 문나이트는 왜 댄스의 메카가 됐을까. 해외 여행은커녕 여권도 흔치 않았던 시절, 이태원은 주한미군과 보따리상들이 드나들면서 따끈따끈한 해외 문물을 전파한 동네였다. 음악도 그중 하나였다. 외국인 전용 클럽이었던 문나이트는 85년 내국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해외 최신 댄스음악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댄서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그러나 문나이트의 인기는 9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시들해졌다. 대형 연예기획사가 등장하고 국내 클럽문화의 중심이 이태원을 벗어난 시기와 맞물린다. 가수를 꿈꾸는 춤꾼들은 문나이트 대신 댄스경연대회나 오디션을 통해 연예계에 진출한다. 또는 끼와 재능을 인정받아 캐스팅된 뒤 기획사에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과 관리를 받는다. 조형일은 “양현석이나 이주노 같은 춤꾼들의 대를 잇는 사람들을 보기 힘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문나이트는 한산해졌다”고 말했다.

 문나이트는 쇠락했지만 그래도 2000년대 중반까지는 명맥을 유지했다. 2004년 문나이트를 인수했던 이상선 사장은 “이태원 클럽문화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생각으로 문나이트를 샀다”며 “하지만 전성기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1년간 운영하다 결국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2011년 드라마 ‘문나이트90’(엠넷), 2014년 뮤지컬 ‘문나이트’로만 그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최근 90년대 대중음악이 다시 관심을 끌면서 사람들의 입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게 됐다. 90년대를 흠뻑 적신 흥과 감성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은 문나이트의 전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곽재민 기자 jmkwak@joongang.co.kr

[S BOX] 60년대 카바레 → 70년대 고고장 → 80년대 댄스클럽 → 90년대 록카페

대한민국의 ‘무도장’은 유행 음악과 시대상을 반영하며 끊임없이 변했다.

 1960년대 무도장은 ‘카바레’로 통했다. 그러다 71년 서울 회현동 오리엔탈호텔의 ‘닐바나’ 이후 ‘고고장’이 대세가 됐다. 고고장은 주로 서울 시내 1급 호텔에 있었다. 강한 비트의 음악인 고고는 댄스뿐만 아니라 패션에도 영향을 주는 등 당대 청춘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이후 70년대 중반 디스코 열풍과 함께 ‘디스코텍’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70년대 젊은이들은 야간 통행금지가 시작하는 자정이면 문을 걸어 잠그고 새벽까지 춤을 췄다. 일종의 ‘해방구’였다.

 80년대 중반부터 ‘댄스 클럽’이 등장했다. 댄스 클럽은 카바레나 고고장과 달리 테이블에 앉아 기본 안주와 술을 시키지 않고 저렴한 입장료만 내면 누구든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밴드의 라이브 연주는 점점 사라져 갔고, 댄스 뮤직을 전문으로 트는 DJ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유명 댄스 클럽은 미국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이태원에 많이 몰렸다. ‘겟츠비’는 당시 연예인·모델·부유층들이 드나들었고, ‘문나이트’는 춤꾼들의 ‘성소(聖所)’였다.

 이태원의 아성은 90년대 흔들렸다. 강남에 대형 댄스 클럽이 하나둘씩 생기면서다. 또 ‘록카페’ ‘테크노 바’ ‘힙합 클럽’ 등 소규모의 개성 있는 클럽이 속속 문을 연 홍대도 인기가 있었다.

 대중문화평론가인 김헌식씨는 “무도장은 음악과 춤을 즐기는, 자유분방한 대화와 사교가 공존하는 하나의 문화였다”며 “90년대 해외여행이 자유화하면서 이태원이 상대적으로 쇠락하고, 강남과 홍대가 뜬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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