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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위 여성부호 베탕쿠르, 치매 노려 돈 빼돌린 지인들 재판 시작

중앙일보

입력

프랑스 화장품 업체 로레알의 상속녀 릴리안 베탕쿠르의 재산을 빼돌린 혐의를 받는 그의 지인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다. [사진 중앙포토]

 
세계 여성 중 세 번째로 돈이 많은 프랑스 부호 릴리안 베탕쿠르(92)의 재산을 둘러싼 스캔들이 법정에서 밝혀진다. APㆍAFP 등 외신에 따르면 프랑스 보르도 지방법원은 26일(현지시간) 치매를 앓는 베탕쿠르의 재산을 몰래 빼돌린 혐의를 받는 지인ㆍ정치인 10명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베탕쿠르는 프랑스의 세계적 화장품 회사 로레알의 상속녀다. 자산 기준 프랑스 1위이자 세계 12위, 여성으로는 세계 3위인 그의 자산은 295억달러(약42조원)로 추정된다.

재산이 많으니 그의 주변에 꾀는 정치인ㆍ예술가가 적지 않았다. 정신이 말짱할 땐 재산을 지키는 데 문제가 없었다. 수년전 발병한 치매가 사달의 원인이 됐다. 지인들은 정신이 혼탁해진 그녀를 등쳐 먹기 바빴다. 측근은 등을 돌렸고 친구는 흑심을 드러냈고 정치인은 마수를 뻗었다. 유산을 받으려는 딸과도 사이가 틀어졌다.

우화와도 같은 이 여성 부호의 비극은 딸이 유언 철회 소송을 걸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베탕쿠르의 딸 프랑수아즈 베탕쿠르 메이예가 사진작가 프랑수아-마리 바니에를 고소한 게 시작이었다.

베탕쿠르가 ”바니에에게 로레알 지분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밝히자, 메이예는 이에 불복해 유언 철회를 주장했다. 메이예는 “어머니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며 유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메이예는 바니에가 베탕쿠르를 속여 피카소ㆍ마티스 등 대가의 회화 작품과 부동산ㆍ현금 등 수억 달러의 재산을 빼돌렸다며 2007년 12월 그를 ‘정신박약악용죄’로 고소했다. 이후 베탕쿠르의 재산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바니에는 베탕쿠르와 1987년 잡지 사진을 찍은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 베탕쿠르는 바니에를 후원하면서 그에게 400만유로(약 49억원) 이상을 그에게 준 것으로 알려졌다. 바니에는 베탕쿠르의 건강 문제를 들어 5억1500만유로(약 6214억원)에 달하는 생명보험을 계약하기도 했다. 이 보험은 베탕쿠르가 건강이 나빠지면서 병원에 입원했던 2003~2006년 계약됐다.

바니에 외에도 베탕쿠르의 회계사ㆍ변호사ㆍ기업 측근 등이 재산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의 혐의는 베탕쿠르의 집사였던 파스칼 본푸아가 2009년 사무실에 몰래 도청기를 설치한 덕택에 드러날 수 있었다. 본푸아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베탕쿠르가 해를 당할까 염려해 도청기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후 수사를 통해 밝혀진 지인들의 횡령 금액은 2001~2007년 동안 7억6590만유로(9400억원)에 이른다.

수사 과정에서 베탕쿠르가 불법 정치자금 후원한 증거가 나오면서 스캔들은 정치권으로 번졌다. 베탕쿠르의 재산 관리인 파트리스 드 메스트르가 대선 후보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줬다는 녹취가 나오면서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선거자금을 관리한 에릭 뵈르트 전 노동장관이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불법 선거자금을 받아갔다는 내용이었다. 이뿐 아니라 드 메스트르가 베탕쿠르에게 보수정당인 대중운동연합의 의원들에게도 수만 유로의 돈봉투를 주도록 부추겼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사르코지는 대통령 후반기에 이 사건에 연루돼 수사를 받았다. 2012년 대선 패배 이후 기소됐지만, 결국 무혐의로 결론났다.

베탕쿠르는 한동안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딸의 주장을 부인했다. 하지만 2011년 치매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고선 법정 후견인으로 지정된 손자의 보호를 받고 있다. 재판에선 2011년 치매 판정을 받은 베탕쿠르가 2001~2007년 당시 정신 건강이 어떠했느냐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현재 베탕쿠르와 피고인들은 당시 그의 정신이 멀쩡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속은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돈을 퍼줬다는 말이다.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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