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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의 덕수는 나보다 덜 힘들어 보이더라 … 아버지는 보수적, 말 안 통한다는 말 가슴 아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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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세대 간 불통은 이 시대의 한 단면이다. 압축적 근대화만큼이나 정보화도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윗세대에 속하는 70~80대는 대화 상대를 잃었다. 그 같은 대화 단절의 현상을 김기봉(56) 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이렇게 표현했다. “디지털 세대는 아날로그 시대를 산 부모 세대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하고 스스로 일궈 나가는 ‘고아 세대’ 같다.”

 소통은 듣는 데서 출발한다. 아는 만큼 이해할 수 있다. 1930∼40년대에 태어난 열 명의 ‘아버지’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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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비참한 시대에 태어나=이들은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겪은 세대다. 국적도 이리저리 뒤집혔다. 삼성 임원 출신인 심명기(74)씨는 일제강점기 ‘황국신민’으로 태어났다. 광복 후 개성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6·25 이후 북한 땅이 됐다. 인공기 아래서 학교에 다니다 1·4 후퇴 때 서울로 내려왔다. 이종덕(80) 충무아트홀 사장은 일본에서 태어나 1945년 광복 직전 한국으로 왔다. “일본에선 마늘 냄새 난다고 왕따 당하고, 한국에 와서는 한국말 못한다고 ‘쪽바리’라고 괄시받았다.”

 먹는 문제도 해결이 안 됐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 파독 광부 생활을 거쳐 고교 교련 교사를 지낸 김정봉(69)씨는 “보릿고개 때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몇 번씩 삶았다 말렸다 반복한 뒤 잘게 빻아 송피개떡을 쪄먹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71∼91년 포스코에서 근무했던 한윤교(79)씨는 네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밥 대신 배 채우려고 비름나물 많이 먹은 게 화근이 돼 급사하셨다.”

 삶의 방향도 예측불허였다. 장건상(66) 월남전참전자회 부회장은 70년 군에 입대, 안동 36사단에서 복무하던 중 71년 갑자기 베트남 가는 맹호부대로 차출됐다. “집에 연락도 못한 채 한 달 훈련 받고 베트남으로 갔다. 집에는 석 달 지나서 편지로 알렸 다.” 경희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파독 광부로 독일에 갔던 하대경(74) 한국파독협회 회장은 “국내엔 취직할 데가 없었다. 파독 광부 신체검사 기준이 체중 60㎏이었는데 당시 체중이 58㎏밖에 안 됐다. 수박 먹고, 물 마시며 체중 불려 겨우 통과했다”고 말했다.

 ② 생활이 치열한 전투=장승필(73) 서울대 토목공학과 명예교수는 68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유학 생활 7년 동안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당시 독일에서 한국인은 식인종 비슷한 미개인 취급을 당했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니 대접이 좀 달라졌다.” 김정봉씨는 파독 광부 시절을 돌아보며 “영화 ‘국제시장’을 봤는데 나보다는 덜 힘들어 보이더라. 지하 막장 온도가 40도까지 올라가 하루에 물을 4∼5L씩 먹어도 다 땀으로 나와 오줌 눈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직장 생활도 치열한 전투였다. 김종해(74) 시인은 “직장에서 떨려나오면 천길 낭떠러지, 온 가족이 죽는다고 생각했다. 상사가 어떤 욕설과 탄압을 해도 붙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남대문시장 점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장기수(72) 동경식품 대표는 매일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다. 겨울이면 동상에 걸려 귀에서 진물이 흘렀다. “직장에서 죽어라 일하는 게 나라를 위한 일이고 나를 위한 일, 가족을 위한 일이었다”(심명기) 등 목숨을 건 절박한 심정은 그 시대의 숙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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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자녀와 시간 많이 못 보내 후회스럽고=이들이 “우리 자식들은 내가 받은 모욕·좌절 안 당하게 해주겠다고 목숨 내놓고 일했다”(장승필)고 기억하는 세월 동안 가족과의 시간이 희생됐다. 심명기씨는 “아버지로서 자녀하고 전혀 시간을 갖지 못한 게 후회된다. 회사 나가는 걸로 다 ‘익스큐스’가 됐고 집사람한테만 맡겼다. 우리 세대에 가정을 버리다시피 한 걸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윤교씨도 “회사생활 하면서 술을 많이 마셨다. 아이들 사춘기 때 올바른 교육 못한 게 가장 미안하고 후회된다 ”고 말했다.

 늦게나마 자녀들과 소통하려는 시도도 한다. 김종해씨는 2남1녀 자녀와 며느리·사위, 손자·손녀 모두 모여 일주일에 한 끼 식사 시간을 갖고 있다. 그는 “결국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했다.

 ④ 세대 갈등 느끼지만=아버지의 눈에 자식 세대가 못마땅해 보일 때도 많다. 이재호(68) 월곡주얼리진흥재단 이사장은 “지금 젊은 세대들은 이 세상이 그냥 굴러떨어진 줄 안다. 우리 세대가 목숨 걸고 일한 결과다. 이걸 너무 소홀히 해 섭섭하다”며 불만을 털어놨다. 장승필씨는 “내 딸도 나와 생각이 다르다. 요즘 세대가 어른들이 너무 보수적이라 말 안 통한다고 할 때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 김정봉씨는 “우리 시대 살아낸 사람들은 화를 잘 낸다. 나도 그런 종류다”고 말했다. “평생을 생존과 맞부딪쳐 싸워야 했으니까…. 조그만 것에도 싸워 이겨야 했으니까….”

 ⑤ 자부심도 크다=열 명의 아버지들은 한목소리로 자부심과 보람을 이야기했다. 김정봉씨는 “우리 민족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우리 세대가 그걸 바꿨다. 내가 그 역할을 했다는 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장건상씨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하루에 약을 94알씩 먹는다”면서도 “우리가 베트남에 안 갔으면 주한미군을 빼서 보냈을 텐데 당시엔 북한 군사력이 남한보다 훨씬 강했다. 내가 가서 우리나라를 살릴 수 있었다”고 했다.

 자부심은 자식 세대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하대경씨는 “현실을 비관하거나 탓하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낸 우리 세대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재호씨는 “자식들이 돈이 목적이 아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특별취재팀=이지영·김호정·한은화·신진 기자
사진=신인섭·오종택·최승식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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