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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앞둔 용산기지 내 문화유산 보존 대책은 깜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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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용산 미군기지 내부엔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는 근현대 `네거티브 문화유산`이 다수 보존돼 있다. 1946년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 대표단이 숙소로 사용한 건물. 일제가 장교 숙소로 만든 것이었다. [사진 용산구청]

1946년 1월 16일 덕수궁 석조전. 미국과 소련 대표단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열린 것이다. 소련은 모스크바 삼상(三相) 회의에 반대하는 사회단체는 임시정부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이에 반대했다.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격렬한 반대 운동 속에 무산되면서 남북은 각각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소련 대표단이 묵었던 건물은 용산미군기지에 보존돼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이 사용 중이다.

 용산 미군기지의 근현대 문화유산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정부가 최근 용산기지 일대에 대한 투자활성화 대책을 발표하면서다.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에 따른 공원화 계획과 함께 개발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기지 내 문화재에 대한 보존 및 철거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제가 만주사변 희생자를 위해 세운 충혼탑(위 사진)은 한국전쟁 후 주한 미군이 전사자 추모비(아래 사진)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용산구청]

 용산기지는 대륙 침략이란 일제의 야욕에서 태어났다. 1910년 무렵 조성되기 시작해 100여 년간 군사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연유에서 기지 내부에 보존된 문화재 대부분은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는 ‘네거티브(negative) 유산’이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대표단 숙소와 6·25전쟁 미군 전사자 추모비 등이 대표적이다. 6·25전쟁 발발 전까지 육군본부로 사용된 벙커도 그대로 남아있다. 2013년 문화재청 조사에선 일제가 만든 병영 100여 동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용산기지가 ‘문화재 저장고’라 불리는 이유다.

 근현대 문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어려 있다. 6·25전쟁 직후 서울에 주둔한 미군은 일본이 사용하던 군사기지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서울역과 용산역이 가까워 대규모 병력 수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후 1967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발효에 따라 일반인이 드나들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분류됐다. 그 결과 60~70년대 부동산 개발 열풍에서 비켜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직전 육군본부로 사용된 벙커 건물 전경. [사진 용산구청]

 정부는 용산공원기획단을 출범시켜 공원 조성에 앞서 기본 설계를 진행 중이지만 문화재 처리 문제에 대해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산하 용산공원기획단 측은 “문화재 존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건물 내부 구조 등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해야 하지만 군사시설로 묶여 있어 현재로선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군사보호시설로 묶여 있다 보니 평택 이전이 완료되기 전까진 사진 촬영 등 실태 조사를 진행할 수 없다.

 용산공원기획단은 평택으로 이전하기 전에 실태 조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미군 등에 요청할 계획이다. 용산기지를 관할하고 있는 자치구의 고민도 크다. 용산구청은 지난해 7월 기지 내 문화재를 조사한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란 책자를 발간하는 등 근현대 문화재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용산공원 착공에 앞서 주민들과 협의해 문화재 보존 대책 등을 논의해야 한다”며 “기지에 남아 있는 시대적 아픔을 어떻게 보존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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