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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팔십 … 자전거 타는 꿈, 청년들 덕에 이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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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한 달 넘게 연습했다. 지난 12일 임종고 할머니가 경기도 수원의 한 공터에서 석은원(왼쪽)씨, 김승엽씨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있다. 이날 할머니는 처음으로 청년들의 도움 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임 할머니와 청년들의 이야기는 오는 3월 다큐멘터리 영상물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사진 석은원]
‘주꿈피 프로젝트’ 멤버 조경모씨(왼쪽)와 석은원씨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임종고 할머니.

올해 여든이 된 임종고 할머니에게도 ‘소녀’ 시절이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속 한 장면도 있다. 중학교 때였다. 친구들과 공원에 갔는데 한 젊은 여자가 두발자전거를 타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이 소녀의 눈에 퍽 예뻐보였다. 그 여자의 자전거가 부러웠다. 하지만 먹고 살기도 쉽지 않던 시절, 자전거는 그저 ‘언감생심’이었다.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임 할머니의 꿈은 여전히 ‘두발자전거 타기’다.

 이런 임 할머니의 사연을 접한 석은원(23)씨 등 20대 청년 6명이 할머니의 꿈을 이뤄주겠다고 나섰다. 프로젝트 명은 ‘주름진 꿈을 피다(이하 주꿈피)’. 석씨는 “우리보다 훨씬 오랜 삶을 산 어르신들의 꿈이 어쩌면 우리 청년들에게는 이루기 쉬운, 아주 사소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세대 갈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꿈’을 통해 자연스럽게 세대 간 소통의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석씨 등은 지난해 9월부터 탑골공원·양로원·복지회관 등을 돌며 180명이 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꿈’을 묻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러다 그 해 11월 경기도 수원의 한 복지관에서 임 할머니의 꿈을 듣게 됐다. ‘임종고 할머니께 두발자전거 타는 법을 전수하라.’ 주꿈피 프로젝트의 첫 번째 미션이 떨어졌다.

 물론 쉽지 않았다. 할머니의 연세를 고려했을 때 잘못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할머니 집에서 30분 거리인 공원에 가서 자전거를 빌렸다. 할머니가 자전거에 타면 한 사람이 자전거 뒷부분을 잡고 양 옆으로 두 사람이 달리며 할머니를 보호했다. 한 달 넘게 연습이 이어졌다. 그 기간 동안 청년들과 할머니는 더욱 가까워졌다. 30년째 임대 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는 임 할머니는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손주처럼 예쁘고 애틋하다”며 “먹을 거 하나라도 더 손에 들려서 보내게 된다”고 말했다. 없는 살림에도 주머니 속 쌈짓돈을 꺼내 청년들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임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연습할 때 ‘힘드니까 그만 할래’라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연습에 진전이 없어도 끝나면 늘 “고맙다”며 청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청년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노년층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조경모(24)씨는 “프로젝트 초반에 어르신들의 어릴 적 꿈 이야기를 들을 때면 역사 책에서만 보던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나오곤 했다”며 “좀 더 그들의 삶을 존중하게 됐고 그들의 꿈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12일 드디어 임 할머니가 두 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뒤에서 손을 놨는데도 할머니는 중심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기분이 그저 좋아.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 뒤늦게 꿈을 이룬 80세 노인은 소녀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청년들은 소셜 펀딩을 받아 3월이 되면 할머니에게 새 자전거를 선물하기로 했다. 석씨는 “주꿈피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라며 “우리들의 작은 행동이 다른 청년들에게도 주위 어르신들의 꿈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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