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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부실 사학은 스스로 문닫게 해주셔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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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경미
홍익대 교수·수학교육학

학창 시절 배웠던 도형 내용의 대부분은 기원전에 정립된 유클리드 기하학이다. 2000년 가까이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던 유클리드 기하학은 19세기에 등장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직선과 한 점이 주어졌을 때 그 점을 지나는 평행선은 유일하다’는 평행선 공준에 기반한다. 그런데 공간이 바뀌면 상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구면(球面)에서는 직선을 대원(大圓)으로 약속하기 때문에 두 직선은 항상 만나게 돼 평행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평행선 공준을 부정하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태동했듯이 확실성을 갖는 진리로 간주되는 지식도 실상은 상대적이고 잠정적인 믿음에 불과할 수 있다.

장황하게 서두를 꺼낸 이유는 평행선이 존재하지 않는 기하학에 주목하기 위해서다. 양쪽 의견이 팽팽하게 맞설 때 흔히 평행선을 달린다고 표현한다. 기하학의 토대를 평면에서 구면으로 옮기면 두 직선이 항상 만나는 것처럼 관점을 바꾸면 상반된 의견도 합일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대학가의 최대 화두는 대학 구조개혁이다. 학령인구의 감소로 입학정원과 지원 학생 수 사이에 큰 괴리가 생기고, 따라서 일부 대학은 문을 닫거나 정원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 인식은 공유하지만 대응 방법에서는 대학과 정부가 대척점에 서 있다. 대학가에서는 대학의 존폐를 시장 원리에 맡겨 놓자고 한다. 대학이 도태되지 않기 위해 어련히 살아남을 궁리를 하지 않겠느냐고 강변한다. 그렇지만 정부의 생각은 다르다. 수도권 대학 위주로 살아남거나 특정 지역에서 대학이 고사되지 않으려면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당근과 채찍이 고등교육 생태계를 건강하게 바꿀 수 있다고 본다.

 대학 구조개혁은 이제 담론을 넘어 실행 단계로 올 상반기에 서면·현장 평가를 실시하고 8월에는 등급과 정원 감축 규모가 결정된다. 다단계의 정책연구와 공청회를 거쳐 확정된 안에 따르면 평가를 통해 대학을 A부터 E까지 5등급으로 나누고 D와 E등급은 재정지원사업과 국가장학금에서 제약을 받게 된다. 상위 세 등급은 이런 불이익을 받지는 않지만 A등급 이외의 대학은 차등적으로 정원을 조정한다. 정부는 2023년까지 최소 16만 명을 줄이기 위해 거의 모든 대학이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비교적 건실한 대학까지 정원을 줄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된다.

 대학 구조개혁에서 우선순위는 부실 대학이 스스로 문을 닫도록 유도하는 데 두어야 한다. 사학 중에는 폐교하고 싶어도 재산을 환수할 수 없어 지체하는 경우가 있다. 지난해 4월 발의돼 국회에 계류 중인 ‘대학 평가 및 구조개혁에 관한 법률안’은 학교법인 해산 시 잔여 재산을 평생교육시설 등으로 전환할 수 있는 조항을 포함한다. 사학이 공익을 위해 출연한 재산을 회수하게 되면 ‘먹튀’ 논란을 가져올 수 있지만 지금은 상황이 절박한 만큼 한시적으로라도 퇴로를 열어주는 게 필요하다. 부실 대학의 자발적인 정리를 촉진하는 법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법안이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

 평가에서 정량·정성지표의 조화는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학생 충원율과 같이 수치화되는 정량지표는 객관성을 보장하고 취·창업 지원과 같은 정성지표는 타당성이 높아 두 지표는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이번 평가는 정량지표에 절대평가를 적용하기 때문에 정성지표의 영향력이 커졌다. 정량지표를 관리하기 위해 편법까지 동원하던 소모적 경쟁을 억제한다는 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 주관성이 개입되는 정성지표가 큰 변수로 떠오른 만큼 우려가 제기된다. 대학의 사활이 걸린 사안이므로 전방위적인 로비가 예상되는 바 평가위원이 외부에 휘둘리지 않는 엄정함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 더불어 정성지표의 채점기준을 정량화하는 시도도 공정성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대학 구조개혁을 주도하는 정부와 이에 반기를 드는 대학의 평행선을 만나게 할 묘안은 없다. 그래도 간극을 좁히려면 우선 대학은 평가의 순기능을 인정해야 한다. 대학이 급작스레 문을 닫을 때 대학 구성원과 지역경제에 미치는 막대한 타격을 고려하면 폐교까지 연착륙시키는 정부의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 구조개혁 평가가 결과적으로는 대학의 서열화를 강화시키지만 특성화를 유도해 경쟁력을 높이는 착한 기능도 수행하니 대학은 이번 평가를 대학의 체질을 개선하는 전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수준 이하 대학에서는 더 과감하게 정원을 줄이고 학생이 선호하는 평균 이상 대학에서는 정원 감축을 최소화하는 게 바람직하다. 또한 외국인 유학생과 성인 학습자를 통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면서 정원 감축의 충격을 완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처럼 한 걸음씩 다가설 때 대학과 정부의 평행선은 교점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박경미 홍익대 교수·수학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