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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환상으로 드러난 '증세 없는 복지' 바로잡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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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가 비극적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집권 3년차가 된 지금, 실현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청와대 빼고 없는 실정이다. 최근 연말정산 소동이 복지 논쟁으로 옮겨붙은 것도 그 때문이다. 현실성이 없다면 이제는 접을 때도 됐다. 마침 올해는 전국 단위의 큰 선거가 없는 해다. 구조개혁에만 골든타임이 아니다. 잘못된 복지 공약을 고치는 데도 유일한 골든타임이다.

 2012년 대선 당시 기획재정부가 “국가 파산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여야는 세금 부담 없이 보편적 복지를 이루겠다며 되레 큰소리쳤다. 그 바람에 박근혜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증세 없는 복지’의 원죄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서부터 꼬인 스텝이 국정 전반을 뒤틀리게 했다.

 2년 전 박근혜 정부는 지하경제 양성화로 27조원, 비과세·감면 축소로 18조원, 세출 구조조정으로 84조원을 확보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다 공염불이 됐다. 지하경제 양성화는 기업활동이 크게 위축돼 중도 폐기됐다. 비과세·감면 축소는 납세자 반발로, 세출 구조조정은 경기를 살리기 위한 재정확장 정책으로 물 건너갔다. 그 바람에 지난해 세수만 11조원 넘게 구멍이 났다. 정부가 뒤늦게 담뱃값·주민세·자동차세 인상안을 내놓았지만 ‘꼼수 증세’ 논란만 부추겼을 뿐이다.

 선거 때 약속한 보편적 무상복지를 고집하면 2014~2018년 복지 분야의 법정 지출 증가율은 연평균 8.4%나 된다. 같은 기간 재정지출 증가율(4.5%)의 두 배에 달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주 2033년께 국가 파산으로 갈 것이라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라는 상호 모순의 프레임부터 벗어던져야 한다. 직접 국민 앞에 나서 이해와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 정부와 정치권의 선택지가 단순해진다. 당연히 국민적 합의를 통해 복지 체계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게 첫 단추다. 기초연금 수혜 대상을 현재의 70%에서 50%로 줄이기만 해도 올해 관련 예산을 약 3조원 줄일 수 있다. 무상보육·무상급식의 보편적·무차별 복지를 꼭 필요한 사람에게 지원하는 맞춤형·선별적 복지로 바꾸어도 한숨을 돌릴 수 있다.

 그래도 복지 재원이 부족하다면 증세 논의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 물론 이번 연말정산 소동에서 보듯 중산층조차 연간 몇 만원의 세금을 더 못 내겠다며 반발하는 상황이다. 경기회복을 위해서도 증세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低)복지-저부담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세금은 적게 내고 복지는 정부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금단현상은 깨져야 한다. 국민들 스스로 정치권이 부추긴 ‘증세 없는 복지’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앞으로 중(中)복지를 위해 추가 부담이 불가피하다면 증세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이라도 사회적 논의의 물꼬를 터서 ‘질서 있는 증세’를 고민하기 시작해야 한다. 복지수요가 급팽창하는 냉엄한 현실과 턱없이 부족한 재원 앞에서 ‘원칙과 소신’은 정치적 신기루일 뿐이다. 박 대통령이 고뇌 어린 결단을 내려야 할 골든타임이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