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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쓰는 해외교육 리포트] <29>스위스엔 대학 입시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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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김나지움은 대부분 토론·토의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학생들은 토론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쉬는 시간 학교 도서관을 자주 찾는다. 사진은 스위스 주립 북 취리히 김나지움의 도서관 모습. [사진 스위스 주립 북 취리히 김나지움]

江南通新이 엄마(아빠)가 쓰는 해외교육 리포트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세계 각지에서 자녀를 키우는 한국 엄마(아빠)들이 직접 그 나라 교육 시스템과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대해 생생하게 들려드립니다.

딸 신해연(20·김나지움 졸업 후 1년간 휴식 가지며 대학 입학 준비 중) 엄마 조윤희(53·스위스 취리히 한글학교 교사) 아들 신해섭(24·주립 취리히 종합대학 영화과 1학년)(왼쪽부터).

학벌·학력 차별 안 하는 나라

스위스 학생들의 최종 목표는 대학 진학이 아니다. 대학을 가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일찍 직업을 갖는 학생이 많다. 스위스의 대학 진학률은 매해 조금씩 차이 나지만 높아봐야 30%를 넘지 않는다. 보통 20~25%정도 선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충분한 수입을 거두며 생활할 수 있고, 학벌·학력 차별이 없기 때문에 대학을 못갔다고 해서 억울할 일도 없다. 기업은 대학 졸업장보다는 지원자의 적성과 숙련도를 중요하게 본다.

 대학에 진학해도 한국처럼 취업에 유리한 학과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 큰 아이인 해섭이도 그랬다. 처음에 법학과를 진학했지만 곧 적성에 안 맞는다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평소 관심이 많았던 영화과로 다시 진학했다. 전공을 바꿀 때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지 취업을 걱정하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는 스위스 부모의 자녀 중엔 영국으로 사진학과 유학을 준비했다가 대학을 포기하고 일을 선택한 사례도 있다. 유학 전 우연히 공연·전시를 함께하는 카페에서 일을 했는데, 문화콘텐트 기획이 적성에 맞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문화공연 기획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명문 대학→좋은 직업’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직업에 귀천 없다’는 말이 스위스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당한 표현 같다.

 

① 베네치아 수학여행에서 함께 한 해연양의 반 친구들 ② 해연양(왼쪽)은 독일어 작문실력이 좋다. 김나지움 재학시절 숙제로 했던 작문이 지역 교육잡지에실렸다.

이런 사회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인 특유의 실용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합리적인 태도 때문인 것 같다. 스위스 사람들은 공부에 뜻을 둔 학생들만 대학에 진학해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공부에 재능이 없다면 적성과 다른 재능을 발견하고 일찍 직업을 갖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본다. 이런 합리성은 교육 제도에 잘 녹아있다.

대학 입학보다 졸업이 어려워

스위스 학생은 초등학교(6년제)를 졸업하면서 진로를 결정한다. 스위스 초등학교는 1~3학년까지 한 담임이 맡고, 4~6학년은 다른 담임이 다시 3년을 맡는다. 고학년 담임교사는 아이의 성향과 재능을 3년 동안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졸업 시점에 대학 진학을 목표하는 중·고등 통합 공립학교인 김나지움과 일반 중학교 중 하나를 추천한다. 일반 중학교는 기초학력과 직업 교육을 병행한다. 이때 5학년 2학기 성적과 6학년 1학기 성적에 기초해 학부모와 상담을 한다. 즉, 초등학교 졸업 시점에 대학을 목표할지 직업을 가질 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스위스 전체로 보면 대략 20%정도 학생만 김나지움에 진학한다. 일반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대부분 직업교육 전문 고등학교에 올라간다. 모두 학비가 무료인 공립학교다.

 일반 중학교로 진학했다고 해서 대학을 못가는건 아니다. 일반 중학교 3학년 때 김나지움 편입 시험을 치를 수 있고, 일반 중학교를 거쳐 직업교육 전문 고등학교에 올라갔어도 소정의 교육과정을 수료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심지어 일찍 직업을 갖고 일을 했던 사람도 해당 직업 분야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경력을 쌓으면 관련 대학·학과에 입학할 수 있다. 본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스위스의 대학들은 평준화돼있다. 대학 입학 방법도 독특하다. 별도의 입학 시험이 없다. 김나지움 졸업 시험을 통과하면 의대·예술대를 제외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학·학과 어디든 자유롭게 입학할 수 있다. 김나지움 졸업 시험이 대학 입학 시험인 셈이다. 대학은 입학보다 졸업을 더 중요하게 본다. 현지 언론은 매해 어느 김나지움 출신이 대학 입학자가 아닌 졸업자를 많이 배출했는지를 조사해 발표할 정도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어두되, 기회를 얻었다면 노력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강조하는거다. 학벌·학력 차별 없는 사회, 질 좋은 직장, 간판보다 지원자의 적성을 먼저 고려하는 기업의 태도, 평준화된 대학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스위스에서 공교육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 낸것 같다.

김나지움은 졸업논문을 제출해야 한다. 주제는 자유다. 해연양은 ‘만남’이라는 주제로 동·서양의 춤을 조사해 졸업 발표회를 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학생 한명 한명을 소중하게 대하는 학교와 교사의 태도다. 둘째 아이 해연이가 유치원 때 일이다. 스위스는 유치원부터 의무교육이다. 그 날은 해연이의 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그날도 분주하게 아침에 유치원 보낼 준비 중이었는데 집 초인종이 울렸다. 생일을 맞은 해연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유치원 교사와 반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유치원 교사와 반 친구들은 예쁘게 꾸민 작은 수레에 해연이을 태우고 걸어서 20분 거리의 유치원까지 끌어줬다. 생일을 맞은 해연이가 주인공이 돼 모두의 축하 속에서 유치원으로 갔다. 그 날 해연이는 하루 종일 특별하게 장식된 의자에 앉아 친구들로부터 “난 네가 잘 웃어서 좋아”“해연이는 예뻐” 등 자기를 칭한해주는 말을 들었단다. 이런 생일 축하는 초등학교에서도 이어진다. 생일을 맞은 아이는 예쁘게 꾸며진 의자에 앉아 친구들로부터 칭찬과 축하를 받는다. 그날 하루는 누구보다 잘난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거다. 엄마로서 정말 그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학교라면 아이를 안심하고 맡겨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연이는 일반 중학교를 거쳐 3학년 때 김나지움으로 편입했는데, 일반 중학교 2학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 전 담임교사가 사정이 생겨 일을 관두면서 새로운 교사가 담임을 맡았다. 그런데 특정 아이를 편애하는 등 반 아이들에게 공정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한국같으면 이런 아이들에게 버릇없다고 면박을 줫을텐데, 스위스 학교의 태도는 달랐다. 교장은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교육청에 보고했고, 교육청에선 담당관을 파견해 조사를 실시하고 해당 교사에게 시정 명령을 내렸다. 그 후에도 정기적으로 교사의 태도에 문제가 없는지를 감독했다. 어린 아이들의 의견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인거다.

“네 생각은 어떠니” 토론식 수업

스위스 사람들은 어떤 문제든 드러내놓고 토론하는 것을 즐긴다. 이런 성향은 스위스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 같다. 스위스는 국토면적은 4만1277㎢로 한국과 비교해 절반 수준에 불과하지만 1인당 GDP는 세계 4위로 8만4344달러에 달하는 경제강국이다. 작지만 강한 나라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강대국 사이에서 오랫동안 중립외교를 지향하며 전쟁의 포화를 피해 간 지혜로운 나라다.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스위스 사람들은 뭉쳐야 살 수 있다는 의식이 매우 강하다. 내부의 분열을 두려워하고 모든 사안에 대해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계속 토론하고 타협점을 찾는 대화 방식이 일상화돼 있다. 이런 스위스 사람들의 성향은 학교 수업에도 고스란히 녹아든다.

 대학 진학을 목표하는 김나지움에 입학하면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된다. 모든 수업은 토론·토의식으로 진행된다. 수업은 “네 생각은 어떠니?”란 질문으로 시작한다. 교사가 먼저 답을 내려주는 경우는 없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000는 이렇게 말했는데, 000의 생각은 어떠니?”

 한 번은 해섭이가 김나지움 3학년 때(한국 중학교 3학년) 독일어 수업에 참관한 적이 있는데 수업이 정말 재미있다고 느꼈다. 결론 부분을 뺀 한 문학작품을 읽고 결론을 유추해보는 수업이었는데, 학생들이 아무리 엉뚱한 대답을 내놔도 교사는 연신 웃으며 “좋은 의견”이라고 칭찬해줬다. 답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 생각을 밝히고 토론하는 것을 강조했다. ‘매번 수업이 이러면 학교가 참 재미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수업이 이러니 시험도 모든 문제가 논술·논증형이다.

파리 수학 여행을 간 해섭군(첫줄 왼쪽에서 두번째)과 반 친구들.

성적 좋다고 해서 특별 대우 없어

김나지움은 학력 관리가 깐깐하다. 스위스에 와 대학 진학을 목표로 김나지움에 진학했다면 각오해야 할 부분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교사의 추천을 받았다고 김나지움 입학이 곧바로 결정되지 않는다. 김나지움 입학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독일어·수학을 보는데, 객관식 문제는 없고 모두 논술·논증형 문제들이다.

 김나지움 3학년에 올라가면 문과·이과·예술·전산(컴퓨터) 중 한 가지를 전공으로 선택한다. 문과 계통은 역사·정치 등 인문사회 수업이 더 강조되고, 이과계통은 수학·과학 등 이과계열 수업이 어렵다. 한국의 문·이과 선택과 비슷하다. 김나지움의 규모에 따라 네 가지 코스를 모두 운영하는 곳도 있고 문·이과 계열 과정만 운영하는 곳도 있다. 해섭이와 해연이가 다녔던 스위스 주립 북 취리히 김나지움은 문·이과 계통만 운영한다. 예술·전산을 선택하는 아이들은 인근의 다른 김나지움으로 편입해 수업을 듣는다. 학생들은 독일어·영어·프랑스어·수학·과학·사회 등 주요과목과 예체능 수업을 들으면서 자기 전공에 따라 더 심화된 수업을 듣는다.

 낙제·유급은 물론 성적이 안 좋으면 퇴학 조치를 받기도 한다. 성적은 최고점 6점부터 0.5점 단위로 3점까지 등급으로 부여된다. 4점 이하는 낙제다. 한 학기에 낙제가 3과목 이상이면 경고를 받고 그 다음 학기에도 낙제가 3과목을 넘으면 유급을 받아 1년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그러고도 다시 낙제 3과목이 또 나오면 퇴학이다. 졸업도 깐깐하다. 필기시험과 구두시험, 졸업논문을 합해 평균점이 낙제점 4점을 넘겨야 졸업할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성적 경쟁을 하지는 않는다. 성적은 절대평가로 매겨진다. 낙제 없이 김나지움 졸업만 통과하면 의대·예술대를 제외하고 원하는 대학·학과 어디든 입학할 수 있다. 학교도 낙제점 인근의 학생들에게만 상담을 집중할 뿐 성적이 좋다고 해서 특별하게 주목받는 일은 없다.

 외국어 교육도 스위스 교육의 강점이다. 스위스는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망슈어(스위스 그라우뷘덴주 일부 지역에서 쓰이는 지역어) 등 네 가지 언어를 공용어로 쓴다. 모든 공산품에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어 표기가 돼 있어 일상 생활에서부터 외국어에 친숙하다. 영어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정규교육을 시작하고 프랑스어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배운다. 스위스 학교를 졸업하면 독일어·영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 등 네 개 정도 언어는 수월하게 한다고 보면 된다.

정리=정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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