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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눈의 나라' 에 홀리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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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터오는 능선이 새하얗다. 태양이 널찍한 설원 위로 말간 얼굴을 드러낸다. 잠시잠깐 붉게 물들었던 하늘에 이내 몽글몽글 구름이 모인다. 그리고선 하늘은 연방 눈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눈은 지치지도, 쉬지도 않고 내린다. 이곳은, 눈의 나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다.

홋카이도는 북위 43도에 위치한 일본 최북단 섬이다. 섬 하나가 우리나라 면적의 84%에 이르지만 인구는 500만 명에 불과하다. 이 넓은 땅이 한적한 채로 남아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없다. 일본에서 가장 혹독한 겨울이 이곳에 찾아들어서다.

최저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도 문제지만, 상상 이상으로 내리는 눈을 맞닥뜨려야 한다. 홋카이도의 대표 도시 삿포로(札幌)의 연간 평균 강설량이 597㎝에 이른다. 동해·오호츠크해·태평양 등 차가운 바다를 지나며 수증기를 머금은 공기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홋카이도에 눈을 토해낸다.

이 땅에 살아가려면 눈과의 사투가 불가피하다. 온 가족이 달라붙어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워야한다. 도로에 쌓인 눈을 갓길에 밀어내고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눈 벽을 쌓는다. 눈보라로 한치 앞을 분간하지 못하기도 하고, 고속도로가 통제되기 일쑤다. 쌓인 눈은 5월이 돼서야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짧은 여름이 스치고 나면 다시 홋카이도는 월동 준비에 들어간다.

그래도 눈이 홋카이도의 축복이라는 데 반기 들 이는 없다. 홋카이도의 황홀한 설경은 모든 불편을 감내하게 만든다. 온 세상이 통째로 얼어붙은 듯 대지는 하얗게 빛난다. 두툼한 흰색 융단이 깔린 땅 위로 날마다 새 눈이 쌓인다.

너른 설원에서 윤곽을 가진 모든 것들이 아름답다. 한 그루의 나무, 집 한 채에 내내 시선이 머문다. 고요한 풍경에 기꺼이 홀린다. 더할 나위 없는, 설국이다.

글·사진=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겨울. 홋카이도의 대지가 헐벗는다. 이내 새하얀 눈이 빈틈을 메운다. 한없이 보고만 있어도 좋을 순수하고 깨끗한 설경이 펼쳐진다. 홋카이도의 한갓진 시골마을, 비에이(美瑛)와 후라노(富良野)는 한겨울 북쪽의 정취를 느끼기 제격이다.

# 비에이-하얀 대지위에 고요한 풍경 자랑

비에이는 도쿄(東京)와 비슷한 크기지만, 인구는 채 3만 명도 안 된다. 한데 이 시골 마을에 한해 150만 명이 찾아온다. 대단한 것은 없다. 낮고 널찍한 언덕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 사이사이에 뾰족한 지붕을 단 집 한 채가 띄엄띄엄 서 있을 뿐이다. 한갓진 풍경이 은은한 감동을 가져다준다.

비에이의 구릉은 네모난 밭으로 개간됐다. 봄부터 가을까지 감자·옥수수·보리·해바라기가 순서를 바꿔가며 색감을 뽐낸다. 그 모양새가 조각조각 천을 이어 붙인 것 같이 보인다고 해서 ‘패치워크 로드’로 불리는 길이 있다.

싱싱한 초록이 물들었던 여름과 달리 겨울 풍경은 처연하고 아련하다. 어디가 밭이었는지, 어디까지가 도로인지 알 길이 없다. 사위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깨끗한 설경이다. 하얀 대지 위에 서서 고요한 풍경을 만끽하기 그만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만 울린다.

비에이 설경의 주인공은 앙상하게 가지만 드러낸 나무다. 개중에는 일본 CF의 배경이 되면서 스타가 된 나무도 있다. 비에이 여행은 이 나무들을 찾아다니는 여정으로 압축된다. 겐과 메리 나무’ ‘크리스마스 트리’ 등 고유 이름도 붙어 있다. 담배회사 마일드세븐 광고에 등장한 잎갈나무 군락이 있는 언덕은 아예 ‘마일드세븐 언덕)’으로 부른다. 내비게이션 좌표까지 갖고 있을 만큼 비에이에서 제일가는 관광 명소다.

이국적인 설경을 담으러 많은 사진작가들이 겨울 비에이를 찾는다. 아름다운 사진을 담을 욕심에 새파란 하늘이 펼쳐지길 바라지만 비에이 하늘은 야속하게도 눈을 뿌리기 일쑤다. 눈보라가 불었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궂은 날씨가 이어져도 자전거를 끌고 나와 사진을 찍는 이들이 있다. 택시를 통째로 빌려서 포인트마다 사진을 찍고 다니는 여행자도 여럿이다.

겨울 비에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문율이 있다. 나무 근처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앞서 다녀간 사람의 발자국이 피사체에 다가갈 수 있는 경계가 된다. 그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존재는 야생동물밖에 없다. 동틀 녘 야생 여우의 발자국이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발자국이 마음속에 여운을 찍는다.

#후라노-파우더 스노에서 즐기는 스키

후라노는 홋카이도 정중앙에 위치한 소도시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홋카이도의 배꼽이다. 비에이에서 차로 30분 정도면 닿는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후라노에는 가혹한 겨울이 찾아든다. 1월 평균기온이 영하 6.6도까지 내려간다. 날씨 변화가 심한 12월이나 1월보다 2월 상황이 조금 낫다.

혹자는 후라노의 진가를 느끼려면 여름이 제격이라고 말한다. 라벤더·사루비아·해바라기 등 열 맞춰 심어진 꽃들이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다. 6월부터 8월까지는 바람에 맞춰 흔들리는 꽃들의 군무를 감상할 수 있다. 겨울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눈 속에 파묻혀버린다. 화려한 꽃이 선사했던 강렬한 색감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새하얀 눈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겨울 후라노에서는 제대로 눈을 갖고 놀 수 있으니 아쉽지는 않다. 겨울 액티비티의 절대 강자를 꼽으라면 단연 스키다. 우리나라에 내리는 눈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 함박눈이지만, 홋카이도의 눈은 건조한 가루눈이다. 파우더 스노(Powder Snow)다. 마찰력이 작은 덕분에 파우더 스노 위로 스키나 스노보드를 타면 미끄러지듯이 활강할 수 있다. 눈이 솜털처럼 가볍고 푹신해서 이리 저리 넘어져도 부상 위험이 적다.

후라노에서 가장 유명한 후라노 스키장을 찾았다. 눈의 세상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밤까지 시끌벅적한 분위기다. 스키나 보드 말고도 즐길 수 있는 에프터 스키(After ski)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뭉친 근육을 풀러 온천으로 향하는가 하면 이글루 바에 앉아서 칵테일 한 잔을 즐기는 이들도 있다. 눈밭에서 스노보트를 타거나 빙판에서 썰매를 끄는 아이들도 신이 났다.

후라노 스키장의 또 다른 명물은 ‘닝구르 테라스’다. 통나무집에 자리를 잡은 가죽 공방이나 갤러리가 모여 있는 공간이다. 통나무집마다 노란색 조명을 환히 밝혀둔 터라 밤이 더 운치 있다.

닝구르 테라스 끝자락에 카페 모리노토케이(森の時計)도 유명하다. 머리가 희끗한 바리스타가 천천히 드립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카페의 널찍한 창 너머로 보이는 자작나무숲도 운치 있다. 겨울밤의 낭만이 깊어져만 간다.

홋카이도는 큰 섬이다. 우리나라 크기의 4분의 3쯤 된다. 갈 곳도 볼 곳도 넘친다. 서로 다른 매력을 품은 도시가 있어 홋카이도 여행은 즐겁다.

#삿포로-2월에는 눈축제로 유명

여느 대도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고층 빌딩이 쭉쭉 뻗어 있고 네모반듯하게 구획된 도로 위에 사람과 차가 북적인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도로 한 편에 사람 키를 넘는 눈이 쌓여 있다는 것이다. 연간 597㎝의 눈이 내리는 홋카이도의 중심도시, 삿포로(札幌) 얘기다.

인구 190만 명이 살고 있는 대도시에 이처럼 많은 눈이 내리는 일도 흔치 않을 터. 눈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반응이다. 여행자는 새하얗게 변한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삿포로의 상징인 홋카이도 구청사 건물도 하얀 배경에 더 도드라져 보인다.

삿포로에서 눈은 곧 노동과 돈을 뜻한다. 삿포로시가 올 겨울 제설 비용으로 책정한 시 예산이 128억 엔이다. 우리 돈으로 약 1168억 원을 눈에 쏟아 붓는 셈이다. 제설작업을 해야 하는 도로 길이를 전부 합하면 5200㎞에 이른다. 서울과 부산을 13번 오가는 거리다. 시에서 운영하는 제설차만 1000여 대, 작업 인원은 3000명을 넘어선다. 삿포로 시민들에게 눈이 애증의 대상인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시민들은 겨울을 즐기는 방법을 일치감치 깨쳤다. ‘삿포로 눈 축제’가 그 증거다. 이 축제를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삿포로에 집결한다. 매년 2월 5일부터 11일까지 1주일 동안 열리는 축제는 올해 66주년을 맞았다. 축제가 열리기 두 달 전부터 30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투입돼 대형 설상과 빙상을 제작한다. 오오도리(大通り)공원과 스스키노(すすきの)거리는 거대한 야외 갤러리가 되고, 여행객들은 눈과 얼음이 만든 하얀 세상을 즐긴다.

#오타루-영화 러브레터의 무대

1990년대를 되짚자면 영화 ‘러브레터’의 추억을 빼놓을 수 없다. 98년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빗장이 풀린 이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개봉됐던 영화가 바로 ‘러브레터’였다.

영화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난생 처음 접한 일본영화라서, 남녀 주인공의 러브스토리가 애잔해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 전반에 등장했던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설경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이 많았다.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러브레터는 겨울을 상징하는 영화로 부지런히 회자되고 있다. 해서 러브레터의 촬영지, 오타루(小樽)를 방문한 사람들은 영화와 얽힌 자신만의 90년대를 회상한다.

꼭 영화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오타루는 충분히 운치 있다. 특히 도시를 가로지르는 ‘오타루 운하’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연상하게 만든다. 특히 해질 녘이면 운하 주변으로 수십 개의 가스등이 불을 밝힌다. 그 순간을 기억하려는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기 바쁘다.

운하를 중심으로 늘어선 벽돌창고는 오타루 개항 시기 바닷길을 오가던 배들의 창고 건물이었다. 지금은 라멘·가이세키(정식요리) 등을 맛 볼 수 있는 음식점으로 개조됐다. 일본의 대표 요리만화인 ‘미스터 초밥왕’의 주인공인 ‘쇼타’가 바로 오타루 출신이다. 싱싱한 홋카이도의 해산물로 만든 스시를 맛보는 기분도 괜찮다.

오타루 여행의 백미는 60~70년대 지은 건물이 즐비한 메르헨 교차로를 거니는 것이다. 카페와 디저트가게, 기념품점이 즐비하지만 특히 수 만 가지 오르골을 팔고 있는 ‘오르골당’이 여행객의 이목을 끈다. 오르골 한 개에 3만~4만원을 하지만 정교하고 섬세하게 만든 터라 절로 지갑이 열린다.

오르골당 앞에는 증기 시계탑도 볼 만하다. 캐나다 밴쿠버 개스타운(Gastown)에 있는 것을 본 따 만들었는데 매시 정각마다 증기를 뿜어 댄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웃음 속에도 허연 입김이 묻어있다.

#아사히카와-뒤뚱뒤뚱 펭귄 산책에 웃음 폭발

아사히카와(旭川)는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다. 일본인들은 한번쯤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꼽는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아사히야마(旭山) 동물원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사히야마 동물원은 우리나라 지방 도시에 볼 수 있는 흔한 동물원에 불과했다. 경영 악화 일로를 걷다가 1980년대에는 폐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동물원에 점점 발길이 끊어진 데는 동물원이 더 이상 재미없는 공간이 됐기 때문이었다. 손님들이 동물원까지 와서 고작 보는 것이라곤 동물이 자는 모습이나 뒷모습밖에 없었다.

사육사들은 고객이 바라볼 수 있는 쪽에서 동물에게 먹이를 주거나 돌봐주는 방식으로 동선을 바꿨다.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아사히야마 동물원은 일본에서 가장 활기찬 동물원이 됐다.

사람들이 몰리자 동물원은 우리 밖으로 동물을 내몰았다. 동물원이 흰 눈으로 뒤덮이는 겨울철에만 열리는 ‘펭귄 산책’이 탄생했다. 1월부터 3월까지 하루 두 번, 킹펭귄 20여 마리가 동물원에 마련된 펭귄 전용 런웨이를 따라 30분간 산책을 한다. 이 이벤트로 아사히야마 동물원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수많은 인파 사이로 당당하게 워킹을 선보이는 펭귄을 보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매년 2월 6일부터 11일 사이에 개최되는 아사히카와의 겨울 축제도 놓치지 말아야할 볼거리다. 아사히바시(旭橋) 카반(河畔) 일대에 크고 작은 눈 조각품들이 전시되는 것 외에도 눈으로 만든 거대한 미끄럼틀을 탈 수 있다. 1994년에는 아사히카와의 자매도시 수원의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을 눈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공식적인 국제 행사인 ‘얼음조각세계대회’도 동시에 개최된다.

◇여행정보=홋카이도 여행의 관문도시는 삿포로와 아사히카와다. 대한항공·진에어·티웨이가 삿포로에 취항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인천~아사히카와 노선을 2월 28일까지 한시적으로 운항한다. 비에이·후라노를 중심으로 여행하려면 아사히카와로 들어가는 게 낫다. 삿포로에서 비에이까지는 차로 3시간 30분 거리지만 아사히카와에서는 30분 만에 갈 수 있다.

한겨울 홋카이도를 여행하려면 방한에 신경 써야 한다. 2월 삿포로 평균기온은 영하 0.6도, 아사히카와는 영하 3.8도다. 온종일 눈밭을 걸어야 하니 방수 신발은 필수다. 양말도 여분을 챙기는 게 좋다. 신발에 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스패츠도 도움이 된다. 삿포로 도심 곳곳에 구두 수선집이 있다. 2000엔(약 1만8000원)을 내면 신발 바닥에 미끄럼 방지 패치를 붙여준다.

겨울 홋카이도에서 꼭 맛봐야할 음식은 털게다. 털게는 알을 배는 5~7월이 제철이지만 겨울 털게 맛도 여름 못지않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몸속에 살을 꽉 채우기 때문이다. 털게는 찐 다음 차게 식혀 먹어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삿포로의 카니혼케(かに本家)가 유명하다. 털게는 색깔과 크기에 따라 17등급으로 나뉘는데 카니혼케는 상위 3등급까지만 사용한다. 모두 홋카이도산이다.

라멘도 필수 먹방 코스다. 삿포로는 미소(일본식 된장)를 푼 국물에 면을 담아내고 아사히카와는 소유(일본 간장) 국물을 즐긴다. 두 라멘 모두 국물에 숙주와 죽순을 가득 넣고, 면발은 살짝 꼬들꼬들한 상태로 즐긴다. 삿포로 에스타백화점 10층에는 일본 전역의 라멘을 먹어볼 수 있는 라멘 테마파크, ‘라멘공화국’이 있다. 일본 옛 상가 거리를 재현해 놓아 관광객에게 인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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