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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한필순 원자력연구원 고문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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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 자립을 이끌어 온 한필순(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고문이 25일 별세했다. 82세.

 1933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이후 미국 일리노이대에 석사, 캘리포니아대 박사를 거쳐 70년부터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83년 KAERI의 전신인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센터 분소장에 취임하며 원자력과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연구소 명칭에서 ‘원자력’이란 단어를 빼버렸다. 예산은 지금 KAERI 예산(3000억원)의 100분의 1인 30억원에 불과했다. 연구원들 사기는 바닥이었고 실적도 지지부진했다.

한필순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이 1999년 11월22일 본지에 연재를 시작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1회. 시리즈 제목인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는 그의 글씨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연구원들을 독려해 원전 기술 자립화를 추진했다. “경제성이 없으니 그냥 외국 것을 사다 쓰자”는 업계의 주장에 그는 “기술이 없으면 노예가 된다”는 철학으로 맞섰다. 한국에너지연구소장(84∼89)과 한국원자력연구소장(89~91년)을 역임한 그는 미국 업체와 영광(현 한빛) 3·4호기 원자로 공동설계를 성사시키고, 한국형 표준원전(KSNP)이 된 한울(옛 울진) 3·4호기 원자로 독자 설계 작업도 이끌었다.

 ‘원자력계의 대부(代父)’로 불린 고인은 1999~2000년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연재한 글을 엮어 회고록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2000년)를 냈다.

한국의 방위산업 사령탑에는 청와대 오원철(吳源哲)이 있고 그 현장에는 반드시 한필순이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고인은 방위산업 진흥에 큰 기여를 했다.

 유족은 아들 한기철·기석(한국화이바 AMS 근무)씨, 딸 윤주(주식회사 콩두 대표)씨 등이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 발인은 29일 오전. 장지는 대전 현충원이다. 02-2258-5940.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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