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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손주 돌보며 자기계발 … 건강·행복 '두 토끼' 잡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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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 그랜드맘’이 나타났다. 맞벌이 가구 500만 시대. 아이 양육이 최대 고민이다. 어린이집에서는 폭행 사태가 발생하고, 가정 돌보미는 경제적으로 부담스럽다. 믿고 맡길 곳은 부모뿐이다. 손주는 조부모에게도 인생 2막을 열게 하는 존재다. 자식 출가 후 혼자 남겨진 엄마가 겪는 ‘빈둥지증후군’을 털어낼 좋은 처방약이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치매 예방을 돕는다. 과도한 육아 부담을 줄여 자기계발과 노년의 지표로 삼는 수퍼 그랜드맘·그랜드파파가 늘고 있다.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다스리는 건강한 노년 육아를 조명한다.

김선영 기자

장영순씨와 손녀 강우림(5)양이 비눗방울 놀이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노년기의 적당한 육아 활동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 신동연 객원기자

손주 가르치려고 영어공부 기초부터 시작

경북 경주에 사는 김신숙(63)씨는 육아로 인생 2막을 열었다. 김씨는 “일찍이 시작한 손주 육아 덕분에 새로운 삶의 기회가 열렸다”고 말했다. 김씨는 어려서부터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다.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에 입학했으나 1년을 채 못 다녔다. 대학생 딸의 결혼과 출산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육아로 딸의 공부가 단절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 순간 ‘멋진 할머니가 돼 엄마보다 더 귀하게 손주를 돌보리라’고 다짐했다. 손주 육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조기 영어교육 열풍이 불던 때였다. 우선 영어를 배우기로 했다. ABCD만 겨우 알고 있는 정도였다. 유아 영어책과 영어사전을 끼고 살았다. 영어 동요 테이프를 습관처럼 손주에게 들려줬다. 직접 가르치진 못해도 교육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체력관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려면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동네 산책로를 1시간가량 걸었다. 틈틈이 맨손 체조를 했다. 육아 중 나타난 오십견 증상도 스트레칭 덕분에 금방 회복했다. 여성 대다수가 겪는다는 갱년기도 바람처럼 왔다 갔다. 아이와 대화하고 교감하느라 아플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육아법 듣겠다” 강연 요청도

젊게 살려고도 애썼다. 어린 아이를 돌보기 위해선 밝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취미생활 역시 즐겼다. 시간을 내 남편과 등산하러 다녔다. 손재주를 활용해 퀼트를 배웠고, 가방을 만들었다. 취미생활은 육아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자 낙이었다.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가정의학과 윤종률 교수는 “노년기에는 사회활동이 줄어 상실감이 밀려오기 쉽다”며 “적절한 육아를 포함한 각종 여가활동은 신체·정신건강에 큰 활력소가 된다”고 말했다.

지금 와서 따져보니 육아활동의 또 다른 수혜자는 김씨다. ABCD밖에 몰랐던 할머니가 영어와 익숙해졌고, 앞선 안목을 갖게 됐다. 남달랐던 육아 사연이 알려지면서 강연 요청도 들어온다. 남들 앞에서 연설할 수 있을 만큼 머리 회전이 빠르며, 어린 아이를 오래 상대해 목소리가 밝고 또랑또랑해졌다.

김신숙씨는 “평범한 중년을 보냈다면 상상조차 못할 내 모습”이라고 말했다. 손주도 잘 컸다. 원어민 교사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만큼 영어에 자신 있는 아이가 됐다. 아이를 바르게 키워준 어머니에 대해 딸 내외도 늘 감사해 한다. 할머니 육아 덕분에 성장이 빨랐고, 예의 바르며 배려심 깊은 아이로 자랐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할머니의 영어교육 열정은 이제 5살 친손주를 향해 있다. 최근에는 손주의 첫 극장 나들이를 기념해 영어 애니메이션을 함께 봤다.

장영순(68·경기도 과천)씨도 건강한 노년 육아를 실천하고 있다. 국가에서 양성한 ‘이야기 할머니’가 된 게 시작이다. 어린이집·유치원으로 매주 봉사를 다녔다. 전래동화 구연은 100% 암기가 기본이다. 이야기 할머니 활동으로 김씨는 암기력은 물론 풍부한 얼굴 표정과 큰 목소리를 갖게 됐다. 즐겁게 노는 법을 알아 손주와도 가까워졌다. 주말에는 자처해 손주 육아를 책임졌다. 직접 장난감도 만들었다. 김씨는 “아이들과 놀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손주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수퍼 그랜드파파도 있다. 전북 전주에 사는 신상채(65)씨 얘기다. 확고한 육아 신념에 따라 손주는 신씨 부부가 맡았다. 조부모 사랑을 받고 크면 인성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란 믿음에서다. 신씨는 직접 육아일기까지 썼다. 주로 조용한 밤과 새벽 시간을 이용했다. 손주와의 일상을 그린 육아일기는 벌써 두 권의 책으로 나왔다. 김씨는 체력관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 헬스장에 가서 유산소·근육운동을 했다. 건강한 할아버지가 건강한 손주를 키운다는 생각에서다. 신씨는 “손주 돌봄에 애착과 신념이 확고하다. 육아의 기본은 건강이다. 체력관리에 소홀할 수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손주돌봄교실 등 전문 교육장 늘어

갈수록 건강한 육아로 노년의 의미를 찾으려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늘고 있다. 요즘 보건소, 구청, 노인복지관, 문화센터에는 예비할머니교실, 손주돌봄교실, 조부모육아교실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한 강좌에 수십 명의 할머니·할아버지가 몰려온다. 이들은 신육아법을 익히고 정보를 공유한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는 “신육아법을 스스로 배우려는 조부모들이 상당수”라며 “단순 육아가 아닌 전문 활동의 영역이 됐다. 노년기에 잃어버리기 쉬운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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