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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압제 벗어나려 과격 투쟁 본격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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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호 10면

16일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무슬림들이 마호메트 풍자만화를 최신호에 다시 게재한 샤를리 에브도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 시민이 ‘나는 마호메트다’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있다. [AP=뉴시스]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으며,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구하는 것과 같다.”

이슬람 종교 어떻게 변천해 왔나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 5장 32절의 말씀이다. 살인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으로 규정한다.

 이슬람은 복종과 평화를 중요시하는 종교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배타적 유일신 종교이긴 하지만 합법적이지 않은 폭력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파리 샤를리 에브도 테러에서 보인 것과 같은 과격성은 적어도 교리적으론 이슬람이 내세우는 가치와는 멀다.

  그렇지만 9·11과 샤를리 테러 등에서 나타났듯이 현대 이슬람 종교가 완전히 폭력성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게 됐다. 물론 이 또한 일부 극단주의자의 일탈행위임에는 분명하다. 이들은 평화적인 이슬람 교리와는 달리 왜 테러나 참수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것일까.

 이슬람과 타 문명권의 대립과 갈등은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은 내부의 권위주의와 외부의 위협 속에서 과격화의 역사적 노정을 반복해 오고 있다.

 622년 예언자 마호메트가 건설한 이슬람 국가는 강성했다. 건국한 지 100년도 안 돼 스페인 남부까지 점령했다.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둔 우마위야(Umawiyya) 왕조는 이슬람 제국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리고 특히 바그다드를 거점으로 한 압바시야(Abbasiyya) 왕조는 이슬람 제국의 최대 전성기를 누렸다. 초기 칼리프 시대에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유혈충돌이 있긴 했지만 융성했던 이슬람 문명 속에서 테러와 과격주의는 없었다. 아랍 최고의 문학작품 천일야화가 등장했다. 신드바드가 양탄자를 타고 돔 지붕이 가득한 도시를 날아다니던 시절이었다.

 내부적 문제점도 있었지만 압바시야 제국의 몰락에는 외부의 침공이 결정적이었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지 팔레스타인과 성도 예루살렘을 무슬림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차례에 걸쳐 원정을 감행했다.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은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다. 십자가에 대한 반감의 시작이었다. 시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암살단이 조직됐다.

 아랍 제국의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세력은 몽골이었다. 1258년 바그다드가 함락됐다. 수도 전체가 불타고 수십만 명이 학살됐다. 몽골의 압제에 대한 반발이 시작됐다. 당시 다마스쿠스에서 활동하던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이슬람 역사의 중요한 사상을 정립한다. 압제적 지도자를 타도하고 비이슬람적인 국가를 타도하는 데 물리력의 사용을 허용한다. 최초의 과격 이슬람주의가 정립된 것이다. 오늘날 과격 이슬람 세력이 가진 반정부 및 반서방 테러 이념의 기원이다.

 13세기 말 오스만 튀르크가 등장하면서 이슬람권은 다시 제국으로 부상한다. 아랍 제국은 아니지만 이슬람화한 튀르크인들의 통치를 아랍인들은 기꺼이 수용했다. 14세기부터 다시 평화의 시대가 지속됐다. 과격주의도 테러도 없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강성해진 유럽 국가들에 의해 이슬람권의 붕괴가 다시 시작됐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이 전환점이었다. 이후 중동 지역은 서방 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이에 저항해 이슬람 부흥주의가 일었다. 유럽 기독교 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서방의 문화적 침탈을 막기 위해 많은 지식인이 이슬람을 통한 정체성 회복과 정치적 단합을 부르짖는다. 테러를 감행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반서방 이슬람주의의 근간이 되는 정치적 사조가 등장한 것이다.

 유럽의 세력 확대로 수세에 몰린 터키가 1922년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이슬람 제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부분 중동 지역은 서방의 통제 아래 있었고 이 과정에서 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서방이 지지하는 이스라엘과 네 차례의 전면전도 있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중동의 정권들도 서방의 세속주의를 모델로 권위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이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투옥된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자 사이드 쿠틉은 서방의 세속주의를 모델로 한 권위주의 체제를 비이슬람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무장투쟁을 독려했다. 이슬람에서 벗어난 독재정권과 ‘침략’ 세력인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투쟁을 모든 무슬림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현대 과격 이슬람주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이슬람 과격 세력은 쿠틉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서방 테러와 갈등의 전환점은 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었다. 이슬람권에 대한 소련의 점령에 저항해 대대적인 성전이 8년 동안 지속됐다. 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금을 지원하고 미국이 무기와 군사훈련을 맡았다. 전 세계 이슬람권에서 자원한 무자히딘(mujahidin·성전 참여자)에게 소련의 군시설을 공격하기 위한 다양한 테러 기술도 전수됐다. 89년 소련이 물러갔다. 승리감에 도취됐고, 전투와 테러 경험을 가진 이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중동에는 반정부 테러가 이어졌다.

 이들 과격 세력이 서방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91년 이후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사막의 방패’ 작전을 위해 미군이 사우디에 주둔하기 시작한 해다. 이슬람 성지에 기독교 미군이 주둔하면서 반서방 테러가 본격화된다. 그 정점이 2001년 9·11 테러다. 이어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가 미국 주도 다국적군에 점령되면서 테러는 더욱 극에 달한다. 과격 세력들이 결집하면서 2014년에는 이라크와 시리아 일부 지역을 장악한 이슬람국가(IS)가 국가를 선포했다. 다시 미국 등 다국적군이 공습을 감행하자 서방 인질 참수 등 보복테러가 극에 달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갈등과 충돌의 노정에서 이슬람 과격 세력은 서방에 대한 반감을 자신들의 이념과 테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 미국 주도의 아프간·이라크전쟁과 점령을 바라보는 무슬림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십자군전쟁을 떠올린다. 현재 이슬람 지역을 공격하거나 주둔하고 있는 서양의 군대를 십자군과 동일시하고 있다.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중동아프리카학과 교수 amirseo@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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