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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규의 ‘한국미술명작선’] ⑥ 아낌없이 물감을 썼다, 과거 시험 그림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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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각, ‘북새선은(北塞宣恩)’ 중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1664년경, 견본채색, 57.9×674.1㎝,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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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화원들은 사신을 따라 매년 중국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들이 사신을 수행한 목적 중에는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채색 물감을 조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구한 안료였던만큼 사용에 많은 제약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궁중회화를 연구한 한 연구원은 이 시대의 채색화를 보면 후기에 비해 안료가 엷게 칠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안료의 수급 문제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제약으로 인해 당시 그려진 채색화는 대부분이 궁중에서 소용되는 그림이었습니다.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대작인 이 ‘북새선은도’입니다. 이 그림은 함경도에서 열린 과거시험을 사실적인 필치로 그린 채색 기록화입니다. 길이가 6.7m에 이르지만 재미있게도 그 형식은 앞서 소개한 계회도를 옆으로 길게 눕힌 것과 같습니다. 앞쪽에 ‘북새선은(北塞宣恩)’이라는 제목이 써 있고 이어서 과거 장면과 합격자 발표를 그린 두 장면이 있습니다.(과거시험 장면은 현재 ‘길주과시도’, 합격자 발표 장면은 ‘함흥방방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당시 과거 시험관을 비롯한 과거 합격자의 명단이 길게 적혀있습니다.

‘북새선은’ 중 ‘함흥방방도(咸興放榜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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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새선은’이란 북쪽 국경과 가까운 오지에서 과거를 실시해 변방에 사는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정에서는 국경 지역의 방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통치력이 고루 미치게 하기 위해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제주도에 특별 과거를 실시해 인재를 등용,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이 그림은 1664년 길주에서 열린 과거 시험을 그린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지방에서 과거를 합격하면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2차 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특별히 중앙의 시험을 면제해준 우대책을 쓴 것입니다. 또 지방적 특징을 고려해 길주에서 치러진 특별 과거는 문과 합격의 정원이 3명인데 비해 무과는 무려 300명을 뽑았습니다. 그래서 과거 장면을 그린 것도 문과는 다루지 않고 무과의 활쏘기 장면을 중심으로 그린 것입니다.

무과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양쪽으로 5개씩 늘어선 표적 가운데를 지그재그로 달리며 5개 이상 맞히면 합격입니다. 실제 시험장 한 가운데 말을 달리며 잔뜩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응시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전 과거장에서 활이 과녁에 적중하면 붉은 기를 들고 북을 쳤으며 빗나간 경우에는 흰 깃발에 징을 쳤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상단 맨 왼쪽 표적 주변에 기수가 붉은 깃발을 똑바로 치켜든 것이 보입니다. 그 앞에 세워진 사람 모양의 표적 한 가운데 활이 명중해 있는 것도 그려져 있습니다. 첫발을 명중시킨 것이니 좋은 스타트를 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이 그림은 행사 기록화이면서도 생동감 있게 사실적 묘사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적 정신은 행사뿐만 아니라 길주 성내의 모습과 주변 산의 표현에도 마찬가지로 발휘돼 있습니다. 그림 속에 보이는 길주 성내와 외곽의 산은 이 시대에 그리는 지도 속의 지형과 거의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붉은 복장의 시험관들이 그려진 건물은 길주 객사인 웅성관(雄城館)입니다. 그리고 청록색으로 칠해진 산 가운데 삐죽삐죽하게 보이는 산은 길주 명물로 길주성에서 40리 떨어진 칼산(刀山)을 그린 것입니다.

과거가 끝나고 3달 뒤인 10월 함흥에서 열린 합격자 발표의식, 즉 방방의(放榜儀) 장면을 그린 그림 역시 매우 정교합니다. 행사에 쓰일 홍패와 어사화가 탁자 위에 놓아있는 것은 물론 함흥 성내의 여러 관아 그리고 성 밖의 만세교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말 달리는 무과 장면과 달리 다소 딱딱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당시 화원 화가로 실력을 발휘했던 한시각(韓時覺ㆍ1621∼88년 이후)입니다. 국경지방 특별우대정책 속에 치러진 행사였던 만큼 조정에서 실력 있는 화원을 뽑아 특파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다릅니다.

당시 과거 시험관인 문인들이 남긴 기록을 비롯해 어디에도 한시각이 공식적으로 파견되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현재의 연구로는 함경도 관찰사였던 민정중(閔鼎重)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주문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오지 중의 오지로 여겨진 함경도에서 치러진 행사에 고급 안료를 사용한 대형 기록화를 남긴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시각(韓時覺ㆍ1621∼88년 이후)

조선중기의 화원으로 자는 자유(子裕) 호는 설탄(雪灘)입니다. 그는 대대로 역관과 의관을 배출한 중인가문 출신으로 부친과 동생은 물론 사위도 화원이었습니다. 그는 20살 무렵에 도화서에 들어가 활동하며 71살 때까지 궁중 화사에 종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일본과 중국 사신을 수행했는데 특히 35살 때인 1655년에는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아있는 그림은 드물어 이 ‘북새선은도’를 포함해 10여점이 불과합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1913년 일본인 상인에게 100엔을 주고 구입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동안 연구되지 않고 있다가 1977년 ‘미공개회화 특별전’을 통해 처음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이후 이태호 교수가 이 그림을 연구하면서 1644년 길주에서 열린 무과 시험과 그해 가을 함흥에서 열린 합격자 발표행사를 그린 것임을 밝혀냈습니다.

글=윤철규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 ygado2@naver.com
한국미술정보개발원(koreanart21.com) 대표. 중앙일보 미술전문기자로 일하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과정에서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역서 『완역-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추사 김정희 연구』 『이탈리아, 그랜드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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