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경영의 최후 승부처는 디자인이다.”
이건희(73) 삼성전자 회장이 1996년 한 말이다. 이때부터 삼성전자는 디자인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명품을 위한 마지막 2%인 디자인의 벽은 높았다. 삼성 디자인은 호평과 혹평을 오갔다. 그 사이 애플은 디자인을 날개로 날았다. 삼성전자가 최후 승부를 위한 칼을 다시 간다. 제품 한두 개가 아니라 근본적인 혁신을 통해서다.
삼성전자는 최근 이돈태(47)씨를 디자인경영센터 글로벌디자인팀장(전무)으로 영입했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런던왕립예술학교를 나온 이 팀장은 세계적 디자인 회사인 영국 탠저린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탠저린은 아이폰 디자인을 주도한 조너선 아이브 애플 디자인 총괄(수석부사장)이 만든 회사다. 애플이 가진 탠저린의 디자인 혁신 DNA를 삼성에도 심는 전략이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디자인 경영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 작품은 영국항공의 비즈니스석이다. S자 형태로 마주 보게 한 좌석으로 승객은 일자로 누울 만큼 넓은 공간을 갖게 됐다. 동시에 영국항공은 이익이 많이 남는 비즈니스 좌석을 20% 더 넣을 수 있었다. 만년 적자였던 영국항공의 영업이익은 연간 8000억원씩 불어났다. 이 팀장은 저서를 통해 “디자인은 디자이너를 위한 자아실현의 도구가 아니다. 늘 기업의 리스크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일하는 디자인경영센터는 윤부근 삼성전자 사장 산하 조직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 팀장은 삼성전자 제품 전반에 걸친 디자인 혁신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이미 수많은 외부 디자이너를 영입해 왔다. 디자인 인력도 1000명이 넘는다. 그러나 제품 디자인은 냉·온탕을 오갔다. 그 사이 디자인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스마트폰 등의 시장이 성숙 단계에 들어서면서 성능이 엇비슷해졌기 때문이다.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디자인 특허 소송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도 절감하고 있다.
디자인 특화 폰으로 내놓은 갤럭시 알파는 시장의 외면을 받으며 단종 위기에 있다. 반면 갤럭시 노트4는 디자인에서 호평을 받으며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 실적 반등의 공신이 됐다.
디자인 혁신의 임무를 맡은 이 팀장의 디자인 키워드는 포어사이트(foresight)다. 데이터와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상상하고 예측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기업은 예측하지 못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지 못해 망한다’는 말을 즐겨 쓴다. 이 팀장은 “이제 업무를 파악하는 단계”라며 말을 아꼈다. 그가 내디딜 다음 행보에 세계 전자 업계의 이목이 모이고 있다.
김영훈·김현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