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TV 드라마 흥행의 핵심…요즘엔 '워맨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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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맨스’에 이어 ‘워맨스’ 코드가 영화·TV 드라마 흥행의 핵심 요소로 주목받고 있다.
‘워맨스’ 코드를 활용한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한 장면.

워맨스

[명사] Womance. 여자(Woman)와 로맨스(Romance)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신조어. 동성애는 아니지만 자매애도 아닌, 우정과 사랑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동지애적인 감정.

여성 시청자나 관객이 TV 드라마나 영화 속에 삽입된 BL코드, 혹은 브로맨스(Bromance) 코드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다. 흔한 이성애자 남자가 영화 ‘신세계’(2012, 박훈정 감독)의 자성(이정재)과 정청(황정민)의 관계 혹은 TV 드라마 ‘미생’(tvN)에 나오는 장그래(임시완)-한석율(변요한)의 관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성적 긴장감을 느끼기는 힘들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수의 여성 관객(혹은 시청자)은 이들 사이에 가상의 러브라인을 그어 놓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한다(심지어 장그래와 오 차장(이성민)의 관계에서 로맨스를 느끼는 시청자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이런 취향을 의식해 TV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 tvN)처럼 아예 쓰레기(정우)를 향한 빙그레(바로)의 짝사랑을 집어 넣어 성공을 거둔 작품도 있었다. 물론 빙그레 역시 드라마가 끝나기 전 의예과 여자 선배(윤진이)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 이성애자라는 게 중요하다.

브라더(Brother)와 로맨스(Romance)를 합해 만든 브로맨스(Bromance)가 어느 정도 사람들의 귀에 익숙해질 무렵, 그 반대편의 워맨스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물론 이 또한 이미 존재하던 경향에 이름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중 문화 상품 가운데 워맨스 코드를 활용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면 영화 ‘델마와 루이스’(1991, 리들리 스콧 감독)를 가장 먼저 꼽게 된다. 수전 서랜던(루이스)과 지나 데이비스(델마)가 연기한 두 여성은 모두 이성애자이며, 심지어 델마는 젊은 남자 제이디(브래드 피트)에 정신이 팔려 둘의 도피를 위태롭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여주인공의 관계는 흔히 말하는 우정의 선을 훨씬 넘어 운명적인 유대를 느끼게 한다. 때로 워맨스 코드는 단 두 사람이 아닌 복수의 관계 속에서 표현되기도 한다. 빈민가에서 자란 네 흑인 여성이 은행 강도를 계획하는 이야기인 ‘셋 잇 오프’(1996, F 게리 그레이 감독)의 경우 스토니(제이다 핀켓 스미스)와 프랭키(비비카 A 폭스)의 관계를 중심으로 네 주인공이 서로 자매애와 흡사한 동지애를 보여준다.

브로맨스와 마찬가지로 워맨스도 동성애와는 분명한 선을 긋는다. 아예 레즈비언들의 애정과 갈등을 그린 미국 TV 드라마 ‘L워드’(2004~2006, Showtime)류와는 접점이 없다. 반대로 이성애를 기본으로 한 멜로 드라마 속에서도 워맨스 코드가 빛을 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 TV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2005~, ABC)의 메레디스(엘런 폼페오)와 크리스티나(산드라 오)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워맨스 코드가 전체적인 여성 등장인물 간의 연대로 표현된 경우는 메가 히트 TV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1998~2004, HBO)에서도 볼 수 있다. 도시 여성 4인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그리던 이 드라마는 결국 “남자들은 왔다가도 가지만 친구들은 영원하다(Boys May Come and Go, But Friends are Forever)”라는 교훈으로 긴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현재 방송 중인 TV 드라마 ‘전설의 마녀’(MBC) 역시 이런 저런 이유로 교도소 한 방에서 수감 생활을 한 네 명의 여주인공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워맨스 코드는 가끔 적대적인 관계에서 표출되기도 한다. 말 많은 영화 ‘쇼걸’(1995, 폴 버호벤 감독)에서 무명 댄서 노미(엘리자베스 버클리)와 스타 댄서 크리스탈(지나 거손)은 영화 내내 적대적인 관계에 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 사실상 같다는 점을 서로 이해하면서 남다른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지난해 방송된 TV 드라마 ‘마마’(MBC)에서도 승희(송윤아)와 지은(문정희)은 각각 태주(정준호)의 아들과 딸을 낳은 사이. 전통적인 TV 드라마에서라면 본처와 시앗의 관계지만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은 적대적인 관계를 벗어나 서로 이해하고 돕는 관계로 새로운 양상의 워맨스 관계를 보여줬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식의 여성 캐릭터 간 관계에 식상한 시청자에게는 신선한 시도로 여겨질 법하다.

여러 면에서 워맨스는 브로맨스와 떼놓을 수 없는 개념으로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남성 동성애자들은 브로맨스를 ‘동성애를 진지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판타지’로 여기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 비해 여성 동성애자들은 워맨스에 대해 호의적이다. 레즈비언임을 밝힌 미국 칼럼니스트 엘리자베스 앤 톰슨은 ‘브로맨스 대 워맨스’라는 글에서 “워맨스라는 개념을 통해 ‘걸프렌드’라는 말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었다”며 동성애자 여성이 이성애자 여성과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워맨스라는 단어를 통해 재정의하기도 했다.

P.S. 물론 브로맨스와 워맨스는 모두 여성 관객에게서만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절대 다수의 이성애자 남성 관객은 둘 중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글= 송원섭
블로그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운영자. 모든 종류의 구경과 참견이 삶의 보람. ‘오지라퍼’라는 말을 만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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