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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끌어안고 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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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지난해 말 송년회에서 친구의 넋두리다. 그는 중앙부처 고참 국장이다.

 “얼마 전 서울에서 업무를 마치고, 세종시 가려고 KTX를 탔어. 깜빡 졸다가 오송역을 지나쳐 동대구역까지 내려간 거야. 부랴부랴 다시 세종시로 올라오는데, 그날따라 어찌나 한심하고 서글프던지. ‘지금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 일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공무원이 공공의 적처럼 취급받고. 쓸쓸해.”

 관료 사회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로 뭇매를 맞으면서 퇴직 후 재취업이 어려워졌다. 공무원연금 개혁으로 생활도 빠듯해질 판이다.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서울과 세종시를 왔다갔다하면서 심신이 지쳐 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건 소중한 명예를 잃었다는 점이다. 하소연할 곳도, 위로받을 곳도 마땅치 않다.

 정권과 관료는 미묘한 관계다. 3공·5공 땐 관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열심히 일해 능력을 인정받으면 출셋길이 열렸다. 복잡하게 다른 생각 할 필요가 없었다. 5년 단임 대통령제 이후 양상이 달라졌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잘나가는 관료의 면면이 바뀌었다. 노무현 정부, 박근혜 정부처럼 집권 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했을 때도 고위 관료는 대부분 물갈이됐다.

 관료들의 셈법도 한결 복잡해졌다. 묵묵히 일만 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었다. 제 앞가림을 해야 했다. 대선 때마다 자신의 고향과 출신학교, 직급, 나이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저것 따져보고 이번에 승부를 걸지, 다음 정권을 기약할지 가늠해야 했다. 인지상정이다.

 대통령도 셈법이 복잡해지기는 마찬가지다. ‘나를 따르라’ 식의 리더십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다양한 속내의 관료들을 끌어안고, 일이 돌아가도록 하는 게 당면 과제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관료사회와 편한 관계로 출발했다. 여건이 좋았다. CEO 출신 이명박 대통령이 공공부문의 비효율을 몰아붙인 뒤였다. 전임 대통령이 줄였던 정부 조직을 다시 늘리고, 관료를 존중했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통치를 지켜보면서 관료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로 고질적인 민관 유착이 드러나면서 틈새가 생겼다. 관피아(관료+마피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는 비정상적인 공직사회의 문제였다”고 정면으로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관료 사회는 동요했다. 좋을 때 참고 넘어가던 것도 상황이 나빠지면 볼멘소리가 커지는 게 세상 인심이다. 세종시가 그런 예다.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2010년 박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안을 받아들였으면 지금 같은 비효율과 고통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 때 세종시장에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다.

  지난해 여름, 2기 내각이 출범하면서 공무원연금 개혁을 끄집어냈다. 대선 공약이기는 하나 수면 아래 있던 것이다. 지난해 초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서도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었다. 재정에 큰 부담을 주는 공무원연금을 손봐야 하는 건 분명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지난해 말 진위야 어떻든 문화체육부 인사 난맥상이 전해지면서 관료들은 다시 상처를 입었다. 급기야 9일 민정수석이 ‘국회에 출석하라’는 청와대 지시를 거부하는 초유의 항명사태가 벌어졌다.

 관료사회가 등을 돌리면 아무리 좋은 취지의 개혁도 성과를 내기 힘들다. 규제개혁을 위해 대통령이 ‘단두대’ ‘암덩어리’ 같은 강도 높은 표현을 써도 일선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다. 일이 어긋나면 국민은 관료를 탓하기 앞서 대통령의 추진력이나 소통 능력에 의구심을 갖기 마련이다.

 대통령으로선 딜레마다. 관료사회의 적폐를 깨고, 무너진 기강도 잡아야 한다. 공무원연금도 고쳐야 한다. 그러면서 일이 되게끔 그들의 마음을 달래야 한다. 쉽지 않다. 이런 때일수록 관료들에게 ‘대통령이 지켜줄 것’이란 믿음을 주고, 품고 가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적폐의 해당자는 엄중 문책하되 관료 전체를 싸잡아 적으로 몰거나 망신을 주는 방법은 좋지 않은 것 같다. 미우나 고우나 관료는 대통령의 손발이자 자식 같은 존재다. 함께 가야 한다.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