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기의 바이오 토크 ④ 암세포만을 '자폭' 시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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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식구 세 명 중 한 명은 평생 한 번은 암에 걸린다. 필자가 말년에 암으로 숨질 확률도 3분의 1이다.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암 진단을 받는다면 난 뭘 할 수 있을까?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했다. 이왕 만났다면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 유명 학술지인 ‘네이처(Nature)’의 지난해 11월호엔 암세포만을 찾아가 암의 ‘자폭(自爆) 스위치’를 누르는 자폭-표적치료제 개발에 성공했다는 연구논문이 실렸다. 이에 따라 지난 30년간 뚜렷한 수단 없이 독한 항암제에만 매달렸던 난치성 방광암 치료에 새로운 길이 활짝 열렸다. 좀처럼 죽지 않고 버티는 암세포의 ‘아킬레스건(腱)’을 찾은 것일까? 인간이 암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진 우선 ‘살아남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암세포는 ‘브레이크’ 풀린 세포

4B연필은 화가에겐 필수품이다. 화폭에 4B연필로 ‘슥슥’ 밑그림을 그린 다음, 그 위에 본격적으로 색칠을 해야만 제대로 그림이 된다. 화가에게 4B연필이 필수 도구라면 암 연구 분야에선 한때 ‘HeLa 암세포’가 최고의 연장이었다. ‘HeLa’는 31세에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한 미국 여성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1920∼1951년)의 이름에서 따왔다. 당시만 해도 정상적인 인간세포를 실험실에서 키우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세포가 며칠 자라다가 다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채취한 ‘HeLa’ 자궁경부암 세포는 실험실 배양접시에서 무한정 빠르게 자랐다. 덕분에 암 연구와 더불어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도 암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세포다. 한 여성의 죽음이 수많은 암환자를 살리는 연구의 받침돌이 된 셈이다.

HeLa 암세포는 왜 죽지 않을까? 거꾸로 왜 사람은 죽을까? 사람의 세포를 떼어내 실험실에서 키우면 태아는 50회, 성인은 25회 분열하면 스톱한다. 실제론 ‘텔로미어’(telomere, 말단소립)란 DNA끈이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닳아 결국은 더 이상 분열하지 않는다. 즉 인간세포의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수명 프로그램’ 설이다. 만약 스톱하지 않고 계속 자라는 세포가 된다면 이는 악몽이다. 암세포가 출현한 것이다. 국내 사망 원인 중 1위가 암이다. 왜 인류는 암과 악연을 맺은 것일까?

길가의 가로수를 유심히 보면 중간중간 불룩 튀어나온 ‘옹이’가 보인다. 오래된 나무일수록 이 옹이는 크고 많다. 바로 나무의 암 덩어리다. 나무에 침투한 병원체에 의해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변한 뒤 빠른 속도로 자라서 암 덩어리인 옹이가 된다. 하지만 튼튼한 식물세포벽 때문에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는 않아 나무가 죽을 정도는 아니다. 동물도 인간처럼 암에 걸린다. 10년 이상 산 개는 45%가 암으로 죽는다. 또 암캐가 제일 많이 걸리는 암은 유방암이다.

암은 인간의 탄생과 함께해왔다. 암은 정상세포가 변한 ‘돌연변이’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정상세포를 등 돌리게 했을까?

DNA가 손상된 세포들의 이중 방어막

얼마 전 필자는 한 대학병원 로비에서 겁에 질린, 흰 피부의 독일인 여성을 만났다. 이 여성은 본인의 팔에 생긴 검은색 반점이 이모의 팔이나 어머니의 등의 것과 비슷하다며 어머니·이모 모두 악성피부암으로 숨졌다고 말했다. 자외선 방어기능이 약한 백인의 경우 피부암에 잘 걸린다. 자외선에 의해 피부세포의 DNA(유전자)가 손상되면 대부분 수리가 된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하면 세포는 그대로 터져 죽어버린다. ‘괴사(necrosis)’라고 부르는 이 죽음은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괴사된 세포가 터질 때 내부물질이 파편처럼 튀어 옆 세포도 ‘파편’을 맞아 염증이 생긴다. 세포가 즉사하진 않더라도 손상된 DNA가 회복될 것 같지 않으면 세포는 스스로 ‘자폭(Apoptosis, 세포 자멸사) 스위치’를 당긴다.
영화 ‘레옹’(1994년)은 국내 개봉 프랑스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모았다. 영화의 백미(白眉)는 마지막 장면이다. 주인공인 킬러 레옹은 12세 소녀 마틸다의 가족 살해범인 경찰 간부와 맞닥뜨린다. 레옹은 이미 많은 부상으로 회복불능 상태다. 결국 그는 자폭 스위치를 당겨 주위의 악당들과 함께 사라지고 소녀를 구한다.

바이러스에 점령당한 세포도 레옹처럼 ‘자폭 스위치’를 당긴다. 본인이 죽어서 전체 세포가 살아남기 위한 ‘자기희생’이다. 이 자폭 과정은 정교하게 60분가량 진행된다. DNA 손상이나 바이러스 침입 신호를 받으면 ‘자폭 스위치’인 p53 암 억제 유전자가 ‘찰칵’ 켜진다. 이어서 파괴할 물건들을 한곳에 모은다. 이후 해결사인 분해효소(caspase)의 날카로운 칼로 내부시설을 조용히, 완벽하게 파괴해 나간다.

마무리 단계로 순찰 중인 면역세포에 신호를 보내 본인의 위치를 알린다. 최후로 내장을 뒤집어 ‘나를 죽여줘’란 마지막 수(手)신호를 보내고 달려온 면역세포에게 ‘장렬히’ 잡아먹힌다.

사람이 살면서 받는 내·외부의 모든 스트레스에 의해 DNA가 손상되면, 손상된 세포는 회복되거나 아니면 자폭해서 돌연변이 세포가 생기지 않도록 이중의 대비를 한다. 물론 자폭한 세포 수만큼 줄기세포들이 생겨 이를 보충한다. 문제는 자폭 기능 자체가 고장 나는 것이다. 세포의 자폭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죽지 않고 계속 자라는 암세포로 변한다. 이때 암세포를 발견·제거하는 인체의 면역세포마저 약해져 있다면 생성된 한 개의 암세포는 결국 암덩어리로 자란다. 이제 우리는 암과의 목숨을 건 ‘일전’을 각오해야 한다.

셀트리온㈜ 이어 삼성이 표적치료제 공장 신축

강원도 용평스키장에서 곤돌라를 타고 정상에 오르면 오른편으로 발왕산 등산로가 연결된다. 그곳에 주목(朱木)이란 나무가 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란 이름에 걸맞은 장수 나무다. 장수의 상징인 이 나무에서 항암제인 ‘택솔’을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유방암 환자 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선 100년 이상 된 주목이 3∼10그루 필요하다. 그래서 나무를 자르는 대신 주목 세포를 배양탱크에서 기르는 방법이 상업화됐다. 택솔은 인체세포가 분열할 때 필수성분인 ‘미세 그물(micro tube)’의 생성을 막아 약효를 발휘한다. 따라서 택솔은 우리 몸에서 자라는 세포를 모두 죽인다. 이 약을 복용하면 급성장하는 암세포가 대부분 죽지만 조금씩 자라고 있던 모발·손톱·피부 일부·생식세포 등도 죽어나가 머리가 뭉텅뭉텅 빠지고 입안이 헐어버리는 항암제 부작용이 동반된다.

암환자 사이에서 ‘붉은 항암제’로 알려진 아드리아마이신을 맞고 구토·멀미 등으로 고생한 사람은 붉은색 커튼만 봐도 토한다. ‘항암주사 안 맞고 그대로 죽고 싶다’란 소리가 나올 만큼 항암제 부작용은 고통스럽다. 화학 항암제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답은 암세포만을 공격해 파괴하는 것이다. 그 선봉엔 표적치료제와 자폭유도제가 있다. 미군이 걸프전에서 297발이나 사용했던 크루즈 미사일처럼 암 표적치료제는 암세포 고유의 암 표지를 목표로 공격하므로 부작용이 확실히 덜하다.

암세포는 특징이 있다. 새로 생긴 암세포들이 모여 고형(固形)암이 되려면 덩어리 내의 암세포에 양분·산소를 공급하는 혈관이 필요하므로 ‘혈관생성 유도물질’을 새로 만든다. 표적치료제는 이런 물질에 ‘찰싹’ 달라붙어 ‘영양·산소 공급로’를 차단한다. 또 암세포는 정상세포와는 다른 물질을 만든다. 유방암 세포는 정상세포보다 100배 많은 수용체(Her2)를 세포 외부에 만든다. 여기에 ‘허셉틴’이란 표적치료제가 달라붙으면 ‘자연살해 세포(NK cell)’가 득달같이 달려와 암세포를 죽인다. 이런 표적치료제를 만드는 바이오산업이 뜨고 있으며 국내에선 셀트리온㈜에 이어 삼성이 공장을 신축했다.

암세포도 만만한 놈이 아니어서 외부 공격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암만이 보유한 아킬레스건을 찾아내야 한다. 바로 ‘자폭 스위치’다. 세계 여성암의 15%를 차지하는 자궁경부암은 인유두종 바이러스(HPV)가 암의 원인이다. 정상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자폭 스위치’가 자동으로 켜지지만 HPV 바이러스는 ‘자폭 스위치’인 p53이 켜지지 않도록 미리 방해물질을 ‘껌’처럼 붙여놓는다. 따라서 ‘껌’ 같은 물질만을 제거하는 암 표적치료제는 암세포만을 죽인다. 최근 전 세계에서 이런 암의 ‘자폭 스위치’를 당기는 물질들을 찾고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고의 항암 무기는, 따라서 표적 추적 기능과 자폭 기능,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진 ‘더블 타깃형’이다. 그러면 정확히 암세포만을 찾아가 ‘자폭 스위치’를 켜 암세포를 조용히 죽일 것이다.

HeLa 암세포 발견 뒤 췌장암 걸린 조지 게이 박사

자궁경부암처럼 바이러스가 원인인 암의 경우 암세포 자체보다는 암세포를 조정하는 바이러스와 전쟁을 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런 암을 정복하려면 바이러스를 없애도록 전략을 짜야 한다. 바이러스가 순순히 물러날까? AIDS(에이즈, 후천성 면역결핍증)를 일으키는 HIV 바이러스는 인체 면역세포의 ‘자폭 스위치’를 눌러 면역세포 자체를 파괴한다. 이처럼 바이러스가 침입해 생긴 암세포는 바이러스 자체가 살아남기 위해 ‘자폭 스위치’를 만든다.

정상세포였다가 자기 스스로 등을 돌린 ‘변절자’ 암세포는 무엇이 목적일까? 사람의 정상세포는 한평생 살다가 죽도록 프로그램 돼 있다. 이런 인간 세포의 한계를 넘어서서 암처럼 무한정 살려는 ‘이기적 유전자’의 반동일까?

기원전 1600년께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에도 유방암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암은 동물의 탄생과 함께 시작됐다. ‘암과의 전쟁’이 어차피 하루아침에 끝날 전쟁이 아니라면 우선 급한 대로 피해가는 것이 상책이다. 암의 시작은 세포 손상이다. 먼저 생활 속 발암물질인 술·담배·자외선·유해식품·독성물질과의 접촉을 최소화하자. 또 DNA가 손상된 비(非)정상세포가 몸에서 생겨도 이를 면역세포가 없앨 수 있도록 신체의 자연면역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건강의 기본’이 어떤 약보다도 중요하다.

HeLa 암세포를 최초로 발견한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의 조지 게이(George Gey·1899∼1970년) 박사는 HeLa 암세포 사용을 전 세계에 ‘무료’로 개방했다. 암 연구에 일생을 바친 그도 결국 췌장암에 걸렸다. 그는 마지막 수술을 받을 때 자기 췌장을 떼어내 암세포 연구에 사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인간의 이런 숭고한 ‘자기희생’은 결국 암이란 시련을 극복하고 넘어서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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