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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소설로 배웠네]<1>세상에 너무 많은 오네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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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연애를 땡땡(OO)으로 배웠네'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돌아가며 쓰는 칼럼입니다. 예술작품, 문화 콘텐트에 나타난 다양한 연애 이야기를 다룹니다. 내 연애 이야기와 연관지어 봅니다.

단, ‘넌 얼마나 잘해서’란 반응은 사절입니다. 그래서 기자 이름도 지웠습니다. 누가 썼는지 맞히려는 노력도 하지 말길 부탁합니다.

첫 회는 ‘연애를 소설로 배웠네’입니다. 연애를 노래로, 드라마로, 영화로 배우는 이야기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시골처녀 타치아나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나는 남자가 좋다고 먼저 고백하는 여자가 아니다. (라고 쓰고 싶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떠오른다.

출장이 문제였다. 강마저도 지적으로 흐르는 도시, 보스턴. 출장 프로젝트에 합류했던 다른 회사의 한 남자였다.

반하지 않았어도 될 순간이었다. 그는 한 미국인이 들어올 때까지 문을 잡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신이 문을 열고 건물에 들어간 뒤 다음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손에서 문을 놓지 않은 채 기다렸다는 얘기다.

오네긴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그 뒷 사람은 미국인이었다. “고맙다”는 영어가 들렸다. 그런데 그 남자의 입에서는 “유 아 웰컴” 같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슈어(Sure)”라고 했다. 보스턴에 어울리는 A급 영어에, 은은한 미소가 어우러졌다.

맞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고백했다. “여자친구 없는 거 안다. 나는 어떻냐”고. 고백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됐다.

오네긴에게 고백하는 타치아나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나는 타치아나였다. 푸시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 등장하는 시골 처녀 말이다. 우연히 이 동네에 놀러온 멋쟁이 남자에게 사랑에 빠진다. 외국 곳곳을 여행해 봤고, 영 딴판인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한 청년의 이름이 예브게니 오네긴이다.

그러니 내가 바로 타치아나였다. 시골에 살면서(보스턴에 들뜨는 서울 사람), 책만 좋아하고(별다른 연애도 못해보고), 그다지 예쁘진 않고(……), 그러다가 갑자기 한 사람에게 꽂혔다. 타치아나는 고백한다.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 이상 말씀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유행하는 헤어 스타일을 하고 런던 신상품 옷을 입은 오네긴은 타치아나를 매몰하게 거절했다. 거절 정도면 다행이다. 거의 혼을 내다시피 했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 처녀가 섣불리 남자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야 되겠느냐. 열정을 이성으로 다스리는 법을 배우라.” 책만 좋아하던 시골 처녀 타치아나에게 이런 가혹한 말이 또 있을까.

정신 차린 타치아나는 곧 귀족과 결혼한다. 그런데 몇 년 후 다시 타치아나를 만난 오네긴은 갑자기 사랑에 불타오른다. “그땐 미처 몰랐다”는 거다. 미친 듯 쫓아다니며 사랑을 고백하지만 타치아나는 차가운 거절을 돌려준다. (잘한다, 타치아나!)

다시만난 오네긴과 타치아나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나도 몇 번 문자를 씹었다. 그땐 타치아나를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귀족과 결혼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자존심 때문이었다. “잘 지내느냐”는 문자, “좀 만나보자”는 전화 통화, 모두 보란 듯 무시했다. 내가 처음 마음을 보였을 때 “음… 나 너무 좋아하지마”라고 했던 말이 사무쳐서였다.

그런데 자신이 한국판 오네긴이라도 된다는 건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인가! 심리를 헤아려보긴 하지만 이해하고 싶진 않다.

오네긴이 고백하자 갈등하는 타치아나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네긴과 타치아나가 당대 러시아 젊은이들의 전형이라 평했다고 한다. 틀렸다. 이들은 시대를 초월해 전세계 젊은이의 전형이다. 여성들은 지나치게 망설이다가 갑자기 삐끗해 변변찮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남성은 자신의 손으로 획득하지 않은 여성의 고백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거절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면 아쉬워한다. 여성은 어긋난 타이밍까지 챙겨줄 마음이 없다. 이 구도는 진보를 못 한 채 몇백 년째 반복되고 있다.

이 반복에 일조하게 된 것을 한 때 후회했다. 그러나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그의 원형을 찾은 후 조금 위로받은 느낌이었다. 문학사상 굵직한 인물을 후대에도 복원해내는 데 보탬이 된 것 같아 뿌듯도 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오네긴은 사절이다. 타치아나 역할도 다른 사람이 좀 맡아준다면 고맙겠다. 나는 할 만큼 한 것 같다.

지나치게 많은 오네긴들아, 도대체 언제쯤 타이밍을 맞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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