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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굿바이 벡, 굿바이 위험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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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현대 사회학계의 큰 봉우리 울리히 벡이 별세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국내에서 그만큼 이름을 알린 해외 학자도 드물 겁니다. 그가 『위험사회』를 펴낸 것은 1986년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이 본격적으로 소개될 무렵인 90년대 초반 국내에서는 대형 참사가 연이어 터졌습니다. 서해 훼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여객기 추락, 삼풍백화점 붕괴 등 굵직굵직한 재난이 그때쯤 벌어졌습니다. 개발도상국에서 막 벗어나는 단계에서 압축성장에 가려져 있던 부실이 고개를 쳐든 겁니다.

 참사가 날 때마다 우리 언론은 벡의 위험사회를 습관적으로 거론하며 그 원인과 배경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벡과 위험사회는 지구촌 어느 곳보다 한국에서 이름을 날리게 됐습니다. 추종자 대열에 당시 사건현장을 어슬렁거리던 저도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참사들은 대부분 벡의 위험사회와 관계가 먼 원시적인 사고였습니다. ‘위험사회’라는 표현이 주는 매혹 때문에 그다지 맞지 않는 사고에도 끌어다 쓴 겁니다. 벡의 생각은 단순 사고의 사용설명서로 쓰기에는 묵직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제 방식대로 설명하면 벡은 크게 세 가지 가정을 타파하면서 위험사회의 윤곽을 잡았습니다.

 ·가정 1, 현대 과학기술은 인류를 더 안전하게 하는가. 아니다. 고도 기술이 고도 위험을 만든다. 원자력 발전처럼 거대한 기술복합체가 인류에 더 큰 위험을 안겨준다.

 ·가정 2, 위험은 통제할 수 있는가. 아니다. “첨단기술로 위험을 막을 수 있다” “확률적으로 도저히 일어나기 어렵다”는 예측이 번번이 빗나간다. 일본 쓰나미가 대표적이다.

 ·가정 3. 위험에 국경이 있는가. 역시 아니다. 세계화 진전과 사고의 대형화로 위험의 경계는 무너진다. 일본 원전 사고의 여파는 동아시아 전체를 위협한다.

 이처럼 위험사회를 떠받치는 요소는 고도 기술과 불확실성, 세계화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인류의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여기던 ‘근대성’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자는 게 위험사회론의 핵심입니다. 단순 사고까지 위험사회와 연결시켜온 관행은 과용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벡의 설명력은 약해질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눈을 구경하기 힘들었던 경주 지역에 폭설이 내려 리조트가 붕괴하고, 고도기술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는 초대형 선박이 어처구니없이 뒤집어지며, 얼굴 없는 사이버 테러에 의해 공공기관·언론사의 서버가 다운되는 등 최근 참사는 과거 사고보다 위험사회론으로 더 잘 설명됩니다.

 벡이 한국에 왔을 때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을 위험사회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표적인 위험사회”라고 답했습니다. 기술화·세계화·근대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사실 그의 진단보다 한국은 더 위험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거대한 무선망으로 촘촘히 연결된 초정보사회이면서 성장이나 근대성에 대한 성찰은 극히 약한 우리만의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무선통신망이 일시적으로 마비되고 공공인터넷망이 해킹당했을 때 우리가 겪은 혼란을 기억해보십시오. 요즘 몇 주만 보시죠. 사진이나 동영상이 반나절이면 수천만 명에게 퍼져 순식간에 분노의 대오가 형성됩니다. 세계화와 근대화에 정보화까지 결합된 ‘제2의 위험사회’가 시작된 것은 아닐까요.

 다행히 노련한 사회학자는 겁을 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세계시민주의’라는 처방전을 함께 제시했습니다. 공공성과 다양성·책임성을 발휘하는 세계시민이 많아지고 그들의 입김이 세질수록 극단적 위험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울리히 벡은 갔지만 위험사회는 여전합니다.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더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각오해야 합니다. 하루빨리 세계 시민이라는 든든한 방패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