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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목요일] 시민의식 길러주는 '경계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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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손녀 같아 귀엽다는 표시를 했을 뿐 성추행 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달 19일의 첫 재판을 앞둔 박희태(76) 전 국회의장이 했던 해명이다. 그는 지난해 9월 강원도의 한 골프장에서 20대 여성 캐디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치인과 교수 등 사회지도층의 성추문이 벌어질 때마다 이들은 “격려 차원이었다” “친근감을 표시한 것이었다”며 되레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현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귀엽기 때문에 신체를 접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서로의 사적 경계를 무시하는 일종의 폭력”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신체뿐 아니라 감정과 언어 등 정서적 영역에도 경계가 있는데 이를 침범해선 안 된다. 개인 간 경계를 함부로 넘나들기 때문에 상대방의 권리와 존엄까지 무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모습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흔히 목격된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인 이모(53·여)씨는 지난달 방학 직전에 아이들 싸움을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새로운 색연필 세트를 꺼냈는데 다른 학생이 “분홍색이 내 것보다 예쁘다”며 허락도 없이 가져가 다툼이 생겼다. 이씨는 “남의 물건을 함부로 쓰거나, 빌렸다 잃어버려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아이가 많다”고 말했다.

 성인들 사이에서도 경계를 무시하는 사례를 쉽게 볼 수 있다. 지하철·버스 등 대중교통에서 무리하게 탑승하다 타인에게 몸을 부딪친 뒤에 사과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내리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밀치며 들어오는 경우도 흔하다. 직장인 권모(28·여)씨는 “지하철에서 숨소리까지 느껴질 만큼 너무 가까이 붙은 경우가 많아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하거나 지하철 한두 정거장은 걸어 다닌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다른 사람의 사적 공간과 정서적 경계를 존중하는 의식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상대방의 경계를 존중하는 교육이 밑바탕 돼야 건전한 시민의식도 생겨난다”고 설명했다.

 경계 존중 교육은 가족·친구·직장동료 등 모든 사회적 관계에 해당된다. 선진국에선 ‘패밀리 바운더리’(가족 경계), ‘피지컬 바운더리’(신체적 경계)와 같은 개념을 활용해 어렸을 때부터 가르친다. 핵심은 나의 경계가 중요한 만큼 상대방의 경계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내가 싫은 것에 대해선 확실히 ‘아니오(No)’라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타인이 ‘아니오’라고 했을 땐 이를 수용해야 한다.

 가정에서 쉽게 따라 해볼 수 있는 방법은 먼저 ‘모든 사람은 사적 경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경계가 희미한 듯 보이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경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한다. 자녀가 원치 않는 스킨십을 하거나 노크 없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등의 행위는 부모 스스로 자제하도록 노력한다. 가족 회의를 통해 경계를 설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서로 지켜야 할 예의와 규율을 정한 뒤 서명을 하고 지키도록 한다. 이 교수는 “‘혼자 있고 싶다’는 아이에게 문을 두드리며 왜 그러냐고 채근할 게 아니라 ‘나중에 이야기해 주렴’이라고 말하며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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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를 인식한 후엔 상대에게 ‘동의 구하기’를 익혀야 한다. 나의 경계만 지킬 게 아니라 상대방의 경계도 존중할 줄 아는 배려심과 책임감을 기르는 단계다. 예를 들어 형이 동생의 과자를 먹을 때 동생의 동의를 구하도록 한다. 엄마·아빠의 물건을 쓰거나 반대로 부모가 자녀의 물건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선 초등학교 저학년 때 ‘원 교육’을 시킨다. 크기가 다른 6개의 원을 그린 후 각각의 원을 자신만의 경계라고 설정한 뒤 아이들로 하여금 누가 원에 들어올 수 있는지 결정하도록 하는 작업이다. 가장 밖에 있는 원에는 악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 그보다 안에 있는 사람은 껴안을 수 있는 사람, 제일 안쪽에는 볼을 비비고 뽀뽀를 할 수 있는 사람 등 아이들이 자유롭게 본인의 경계를 설정하고 거절하는 법을 배운다.

 서구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경계를 존중하는 문화는 뿌리깊다. 남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일본의 ‘메이와쿠 가케루나(迷惑を 掛けるな)’ 문화가 대표적이다. 지하철에서 빈자리가 나도 양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몸이 닿을까 의식해 앉지 않을 정도다. 부모들은 식당에서 다른 손님들에게 불편함을 줄까봐 자녀가 외투를 밖에 나가서 입고 벗도록 한다.

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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