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으로 파괴된 한강대교가 1956년 복구돼 준공식을 가졌다. 서울시청 직원은 당시 보기 드문 한지를 쓰기 좋은 크기로 수십 장 가져와 제자(題字)를 부탁했다. 놀라는 내게 그는 ‘실은 이승만 대통령께 휘호를 받으려고 경무대에 이것을 준비해 갔는데 대통령께서 한글 서예는 익숙지 않으니 선생을 찾아보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중 (一中) 김충현(1921∼2006)은 36세로 ‘한강대교’(1957)를 쓰던 때를 이렇게 돌아봤다. 일중은 1942년 ‘우리글씨 쓰는 법’을 펴냈고 궁체·훈민정음·용비어천가 등을 연구해 ‘한글 고체’를 창안했다. 동생인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과 함께 20세기 한국 서예를 이끈 형제 거목으로 꼽힌다.
일중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년)는 15일부터 서울 관훈동 백악미술관에서 기획전 ‘서예가 건축을 만나다’를 연다. 일중이 쓴 현판의 실물 30점과 탁본·사진 등 40여 점을 전시한다. 사업회는 이를 위해 지난 2년간 일중이 전국 각지에 쓴 현판을 전수 조사, 도록을 펴냈다. 총 183건으로 집계됐다. 김 이사장은 “현판은 서예가 대중에게 다가가는 작업인데, 옛 건물이 사라지면서 함께 없어질 수도 있는 까닭에 이번 작업을 서둘렀다”고 말했다. 현판은 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나 벽에 거는 널조각이다. 편액·주련·표지 등으로 세분된다. 전시를 기획한 정현숙 열화당책박물관 학예실장은 “궁궐·사찰·유적지·서원 등지의 현판은 그 건물의 얼굴로, 당대 명필들이 썼다”고 설명했다.
현판은 건물의 역사와도 함께한다. 경기도 여주에 우암(尤菴) 송시열(1607∼89)의 사당이 있다. 정조가 ‘우암만한 큰 어른(大老)이 나라에 없다’는 비문을 지어 ‘대로사(大老祠)’가 됐다. 후에 흥선대원군이 스스로를 ‘대로’라 칭하자 사당 측은 ‘강한사’로 이름을 바꾸며 현판을 내렸다. 후에 옛 이름을 되찾으며 일중이 새 현판과 주련을 썼다.
일중은 당시 현역 서예가로는 가장 많은 현판을 남겼다. 4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반세기 넘게 붓과 벗한 일중 서풍의 변화는 현판에서도 볼 수 있다. 정 실장은 “초학자 시절 기교 없는 순박한 글씨로 시작, 가장 많은 현판을 썼던 60, 70년대엔 웅건한 서풍으로 근본을 탄탄히 했다. 절정기인 80년대 유려하고 웅강한 ‘일중풍 예서’를 창안했으며, 만년엔 비운 듯 순진한 글씨를 썼다”고 분석했다. 전시는 다음 달 25일까지. 02-734-4205.
권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