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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으론 첫 태극무공훈장 … "내가 대한민국 지켰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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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명수옹 군복의 훈장은 그의 전공을 말해준다. 왼쪽에 보이는 게 태극무공훈장이다. [사진 육군]

5일 88세로 별세한 이명수옹은 생전 늘 “내가 대한민국을 지킨 이명수요”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예비역 중위로 군문(軍門)을 나선 그는 ‘일등상사’로 불리길 더 좋아했다고 한다. 조국의 운명을 구했던 그때 청춘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처럼.

 이옹은 23살이던 1950년 6·25 전쟁을 맞았다. 일등상사를 달고 육군 3사단의 소대장이 됐다. 장교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의 부대는 인민군의 공세에 경북 영덕까지 밀려났다.

 그해 7월 “8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선에서 일진일퇴가 거듭됐다. 앳된 학도병이 교복차림으로 투입될 만큼 위기상황이었다. 인민군은 당시 국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탱크를 앞세워 밀어붙일 태세였다. 중대장은 소대장을 모아 “누가 특공대를 조직해 적 탱크를 파괴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때 이옹이 “제가 맡겠습니다”며 손을 들었다. 그는 훗날 “당시 ‘오늘을 위해 내가 군인이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옹은 7월28일 오후 9시 자신을 포함한 12명의 특공대를 꾸려 적진에 침투했다. 도중 계곡에서 쉬고 있는 인민군 1개 소대를 기습했다. 포로를 심문해 그날 적의 군호(軍號)가 ‘쥐’와 ‘새’라는 걸 알게 됐다. 특공대는 꾀를 내 탱크 해치를 주먹으로 두드린 뒤 “쥐”라고 했다. 적 전차장이 “새”라며 해치를 열면 그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이렇게 적 전차 3대를 격파했다. 어둠 속에서 대원 몇 명이 길을 잃어 포로가 되자 29일 이옹은 다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아군 포로를 구하며 적 1개 중대를 섬멸했다. 육군본부의 『전장사례연구』는 그의 지휘를 “특공전투의 전범”으로 평가했다. 이어 “포로가 된 부하대원을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건 행동은 깊은 강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기 위해 부모가 죽음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적었다.

 이옹과 특공대원의 활약에 인민군의 발이 묶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힘이 됐다. 이옹은 50년 9월 적의 수류탄에 부상을 입었다. 머리에 파편이 박히는 중상이었다.

 51년 10월 15일 이옹은 사병으로선 처음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태극무공훈장은 군인으로선 최고의 영예다. 육군은 62년까지 병(이등병·일등병)과 하사관(하사·이등중사·일등상사·특무상사) 계급을 모두 사병이라 불렀다. 그는 훈장을 받으면서 “특공대 전원이 함께 세운 전공인데 나 혼자 받아 정말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는 9사단에서 보개산-고대산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를 치러 화랑무공훈장·을지무공훈장 다섯 개를 더 받아냈다. 63년 3월 육군중위로 예편했다.

 전쟁은 그에게 영광과 함께 시련을 안겼다. 전상 후유증으로 병치레가 잦았다. 머릿속 파편은 그의 또 다른 반려자였다. 부인 최순일(79)씨는 “자다가 악몽에 시달려 비명을 지르며 깬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79년 뺑소니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87년 아픈 몸을 이끌고 ‘무공수훈자회’를 만들었다. 옛 전우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였다.

 유족으론 부인 최씨 외 2남 1녀.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일등상사’의 빈소에 별을 단 장군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발인은 8일 오전 9시. 육군장으로 치러진다. 중위 이하 계급에서 육군장이 거행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장지는 서울 현충원.

분당=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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