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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도청 테이프 내용 보도금지 결정은 타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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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재판장 김만오 수석부장판사)는 MBC가 "국정원(옛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을 직접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금지한 가처분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낸 이의 신청을 22일 기각했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테이프의 형성 경위와 편집 또는 조작 가능성, 보도의 내용 등 제반 사정을 참작하면 테이프 원음을 직접 방송하거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는 등의 행위를 잠정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MBC가 보도하려는 내용은 공공적인 성격이 있어 보도 가치는 인정되지만 언론 보도 역시 위법하지 않은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하며, 언론 자유나 국민의 알 권리에 못지않게 사생활의 비밀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도청 테이프의 녹취록과 관련, 재판부는 가처분 신청 내용에 포함되지 않아 보도의 불법성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다.

다만 "가처분이 테이프에 담긴 내용, 혹은 그와 관련된 일체의 내용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아니어서 언론의 자유나 국민의 알 권리가 본질적으로 침해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앞서 재판부는 7월 21일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홍석현 주미대사가 "1997년 대선 직전 삼성 인사가 일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나눈 대화가 담겨 있다는 불법 도청 테이프의 방송을 금지해 달라"며 MBC를 상대로 낸 가처분 신청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당시 재판부는 ▶아나운서.기자의 육성이나 자료화면.자막 등을 이용해 테이프의 원음을 직접 방송하거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실명을 거론하는 행위를 금지시켰고, MBC는 이에 불복해 이의 신청을 냈다. MBC 관계자는 이날 "항소 여부를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김현경.천인성 기자

[뉴스 분석] "언론보도 과정 적법해야" 원칙 세워
내용 밝힌 언론사 법적 책임 물을 수도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더라도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과정이 실정법의 통제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나 그 2차적인 증거는 유죄 증거로 쓸 수 없다'는 '독수(毒樹)의 과실' 원리는 언론의 보도 문제에서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봤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목을 내세우더라도 불법 도청을 금지한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해 얻은 정보는 보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도청 행위는 물론 도청 내용의 누설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제16조). 이를 어길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적법 절차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공중도덕 및 사회윤리를 훼손하는 불법적인 취재와 보도를 조장하고, 자의적인 기준으로 정보를 취사.선택해 정파적이고 편향적인 보도를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언론 자유만을 강조해 불법 정보를 보도하는 것에 아무런 제한을 가하지 않는다면 법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임무를 지닌 법원이 사실상 불법적인 상태를 용인하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이번 판결은 위법하게 수집된 정보를 여과없는 보도하는 것을 법원이 인정해 주기 힘들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힌 첫 사례"라며 "MBC는 물론 불법도청테이프 녹취록을 보도한 다른 언론사들도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테이프에 담긴 내용이 이미 일부 언론기관 등을 통해 상당 부분 보도된 상황이므로 방송을 허가해 달라'는 MBC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테이프 내용이 공개될 경우 대화 주체들에 대해 테이프 내용에 관련된 새로운 '인상'을 국민에게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판결문 내용>

(1) 민주주의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누구나 자유로운 의사의 표명과 의견의 교환을 거쳐 진리를 발견하고 개인이나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목표에 관한 통합점을 찾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보장받는 것이 필요하다 할 것인바, 오늘날 민주정치를 구현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는데 필요한 정보의 수집?전달과 이를 통한 건전한 여론형성 등의 공공적 기능이 주로 언론기관에 의하여 수행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다양한 사상과 가치관이 자유롭게 전파되기 위한 전제로서의 표현의 자유 내지 언론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2) 그러나 한편으로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취재?보도에 있어서의 공정성과 객관성 유지에서 벗어나 개인이나 단체와 같은 사회활동 주체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훼손하거나 정보의 형성과 취득 및 처리와 전달 과정에서 타인의 보호받을 가치 있는 인격 내지 사생활의 비밀과 통신의 자유 등을 현저히 침해하게 된다면, 수단에 불과한 정보 혹은 보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오히려 의사형성과정이 위축되고 극단적인 가치관만이 살아남게 됨으로써 언론의 자유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 자체가 무의미 해질 수 있으므로 결국 객관적으로 국민이 알아야 할 공공성?사회성을 갖춘 사실 및 사회적 관심사인 특정 대상에 대한 사실주장과 의견표명을 위한 언론보도에 있어서도 일정한 내재적 한계와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다.

(3) 이러한 관점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보면, 채무자가 방송을 통하여 보도하려고 기획하였던 내용은 '1997년 대통령선거 무렵 일어난 불법적인 정치자금의 제공과 특정 대기업 및 언론기관의 연루의혹'으로 요약되는 것이어서 국민의 주된 관심사가 될 수 있는 공공적인 성격을 가진 사실이라 볼 수 있으므로 일응 그 보도가치 자체는 인정된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 혹은 국민의 알 권리와 같은 다른 헌법적 가치 못지않게 모든 국민은 응당 사적 대화 내지 사생활의 비밀과 공개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의사전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을 가지는바, ① 사법작용을 포함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려는 모든 국가작용은 정당한 법률을 근거로 적정한 절차에 따라 행사되어야 하므로 수사기관이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물론 그 이차적인 증거 {독수의 과실(the fruit of poisonoustree)} 역시 유죄인정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등의 의미를 지닌 '적법절차의 원리'는 통신 및 대화의 비밀과 자유를 보장 하고자 불법적인 도청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하여 취득된 정보인 이 사건 테이프의 내용이 언론기관을 통하여 제한 없이 보도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하는 점, ② 또한 정보의 형성과 취득 및 처리와 전달이 언론보도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통제 없이 허용된다고 보면, 보호받을 가치 있는 사생활의 비밀이나 공중도덕 및 사회윤리를 훼손하는 불법적인 취재와 보도를 조장하고,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정보의 취사?선택이 이루어진 정파적이고도 편향된 보도를 방임하는 결과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언론보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위법하지 않으면서 적절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③ 게다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근본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국민이 알아야 할 공공성을 갖춘 사실을 보도함에 있어 언론기관으로 하여금 명예훼손 등에 의한 형사적 제재를 염두에 두게 하여 보도 자체를 주저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지만, 불법적인 방법으로 형성된 정보가 언론기관을 통하여 보도됨으로써 사후적으로 그 민.형사적 책임이 문제된 사안과 달리 정보원의 위법성을 이유로 보도의 범위를 일정하게 제한할 수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된 이 사건의 경우 언론의 자유만을 강조하여 위법한 방법으로 수집된 정보가 여과 없이 그대로 보도되어야 한다고 보게 되면, 적법절차의 보장을 통하여 법질서 유지의 책무를 담당하는 법원이 사실상 불법적인 상태를 용인하는 결과가 되는 점, ④ 무엇보다도 이 사건 가처분은 이 사건 테이프에 담긴 내용 혹은 그와 관련된 일체의 내용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아니어서 언론의 자유나 국민의 알권리가 본질적으로 침해되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채무자로서는 이 사건 가처분 이후의 보도와 관련하여서는 추후 본안소송과정에서의 구체적인 주장.입증을 통하여 보도의 정당성과 적법성을 다시 다툴 기회를 가질 수 있어 별도의 사법적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채무자가 이 사건 테이프에 담긴 내용을 보도하려고 함에 있어서는 일정한 한계가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4) 결국 이 사건 테이프의 형성 경위와 편집 또는 조작 가능성, 보도의 내용 및 그 대상 등의 제반사정을 참착하면, 채무자로 하여금 이 사건 테이프의 원음을 직접 방송하거나 이 사건 테이프에 나타난 대화내용을 그대로 인용 혹은 이 사건 테이프에 나타난 설명을 직접 거론하는 등의 방법으로 방송하는 등의 행위는 이를 잠정적으로 금지토록 함이 타당하다.

(5) 그렇다면 채권자들에게는 자신의 명예 등의 보호를 위하여 앞서 본 바와 같은 요건과 형식하에 채무자에 대하여 이 사건 테이프에 담긴 내용의 보도 금지를 구할 권리가 있다 할 것이고, 나아가 일부 언론기관 등을 통하여 대화의 주체가 특정인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사건 테이프의 내용이 상당 부분 보도된 상황이라 할 지라도 전파가능성이 크고 사회적 파급효과가 높은 방송매체의 특수성에 비추어 채무자에 의하여 이 사건 테이프에 담김 원음이나 실명 등이 그대로 방송되는 경우 채권자들의 사생활이나 명예가 현실적으로 침해될 위험성은 더욱 높아지는 한편, 이 사건 테이프의 내용에 간련된 새로운 '인상'을 국민에게 다시금 심어줄 수 있다는 측변에서 여전히 가처분으로써 이를 금지할 보전의 필요성 역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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