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루 스타일의 칼라를 가미한 연주복을 입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아래)와 화려한 실크 셔츠에 캐주얼 바지를 입는 린지 4중주단.
'펭귄표 유니폼' 을 아시나요. 근엄한 표정의 중후한 클래식 연주자나 지휘자들이 입는, 꼬리 달린 검은색 턱시도에 흰색 나비 넥타이 차림 말이에요.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연미복을 벗고 캐주얼한 느낌의 의상을 입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네요.딱딱하기만 해보이던 클래식 무대에 어떤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일까요.
# 연주복은 운동복이자 작업복
열정적인 맨손 지휘로 유명한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한 곡만 연주해도 턱시도가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많이 흘린다. 23~2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모두 일곱 번에 걸쳐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등을 들려줄 그가 준비한 의상은 어떤 것일까.
그의 연주복은 20여 벌. 모두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남성복 브랜드인 에르메네질도 제냐가 특별히 제작해 선물한 것들이다. 통상적인 연미복 스타일 외에 캐주얼 스타일, 셔츠 스타일, 구루(무술도사) 스타일 등 4종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구루 스타일과 캐주얼 스타일을 번갈아 입을 예정이다.
2일 베이징에서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열린 '평화를 위한 월드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만난 제냐의 홍보 이사 안나 제냐(46)는 "양팔을 크게 움직이더라도 어깨가 불편하지 않고 구김이나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신축성이 강한 특수 소재를 사용했다"고 소개했다. "가벼운 안감을 사용해 무대 조명을 세게 받더라도 땀을 쉽게 흡수하고 통풍이 잘 된다"는 설명이다.
제냐와 게르기예프의 관계는 단순히 연주복 제공 관계를 넘어 기업 메세나의 새로운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경영학계에서는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 극장에서 보여준 리더십과 개혁 의지를 제냐가 기업 이미지 제고에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게르기예프 역시 음반 재킷을 통해 자신의 무대 의상에 대해 빼놓지 않고 언급하면서 제냐의 매장 오프닝 행사에도 수시로 참석한다.
패션성에 기능성을 가미한 제냐의 콘서트 수트는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바리톤 레오 누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 지휘자 사도 유타카(佐渡裕) 등도 즐겨 입는다. 스포츠 종목에 따라 운동복이 다르듯 악기에 따라 디자인은 약간 다르다.
# 펭귄표 유니폼이여, 안녕 !
게르기예프 외에도 '펭귄표 유니폼'을 벗어던지는 연주자들이 늘고 있다. 비교적 드레스 코드에서 자유로운 성악가나 독주자들이 대부분이다.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는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가 디자인한 연주복을 입는다. 이세이 미야케 특유의 주름 잡힌 원단과 입체적인 재단 때문에 움직이기 편하고 여행 가방에 넣고 다녀도 구겨지지 않는다고 자랑한다. 노르웨이 출신 피아니스트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도 미야케의 캐주얼 수트를 입고 무대에 선다.
미국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은 1998년부터 이탈리아 디자이너 지안 프랑코 페레의 연주복을 입다가 최근에는 영국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와 이세이 미야케의 옷을 입는다. 프랑스 피아니스트 장 이브 티보데 역시 웨스트우드의 캐주얼 수트와 가죽바지를 입는다.
일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는 인민복 스타일의 흰색 연주복을 입기로 유명하다. 칼라가 없는 만다린.구루 스타일은 지휘자 크리스토퍼 에셴바흐(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피아니스트 쿵샹둥(孔祥東) 등도 즐겨 입는다.
영국 린지 4중주단은 화려한 실크 셔츠에 캐주얼 바지를 즐겨 입는다.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는 여성 단원에 한해 빨간색 블라우스나 드레스를 입도록 했다. 남성 단원들도 턱시도를 입을 때 빨간색 허리띠(카머반드)로 통일해 검정과 빨강의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검정 일색의 지루함에서 탈피해 관객에게 보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다. 네빌 마리너가 이끄는 런던 세인트 마틴 아카데미 오케스트라도 여성 단원들에 한해 청색.녹색.보라색 블라우스를 골라 입도록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연주복의 패션화에 대해 마뜩잖다는 지적도 있다. 멋진 몸매를 뽐내기 위해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을 경우가 대표적이다. 연주자의 옷이 편하지 않으면 청중도 불편하다. 연주자의 옷에 눈길이 가거나 연주자가 불편해 하는 인상을 주면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단합된 모습을 연출해야 하는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의 의상은 아직 패션성과는 거리가 있다. 헤어스타일까지 통일하도록 요구하는 여성 합창단도 있다. 뉴욕필은 저녁 공연에서는 여성 단원들에게 반드시 치마를 입도록 요구한다. 시카고 심포니는 여성 단원의 소매와 치마 길이까지 규정해 놓고 있다. 이와 함께 수시로 합류하는 객원 단원까지 일일이 새 유니폼을 맞춰주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점도 있다. 연주복의 개성 연출은 아직까지 지휘자.독주자.실내악단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셈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