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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다시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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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함영준
한국문화포럼 대표

가난했던 시절 우리는 영화를 통해 힘든 현실을 달래 나갔다. 나치의 지배를 피해 스위스로 망명해 가는 폰 트랩 집안의 실화를 담은 줄리 앤드루스 주연의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1965년작)’은 가족·사랑·음악이라는 소재를 통해 고난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제시해 주었다.

 불량 청소년들을 끝까지 바르게 교육시키려는 흑인 교사(시드니 포인티어)가 주인공인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1967년작)’은 한창 반항적인 사춘기 소년에게 바른 선생님 상을 심어준, 교과서보다 더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장성하면서 맞닥뜨린 거친 세파는 ‘영화는 영화’, ‘현실은 현실’이라는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내게 닥친 현실은 영화처럼 낭만적이지 않았고 부조리 했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서 담금질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동안 나는 수많은 반전 과 치환 을 목격하게 됐다. 기업이나 민족, 국가의 흥망성쇠는 물론이요, 승승장구하다가 하루아침에 절벽 아래 구렁텅이로 떨어지거나, 반대로 절망 속에서 헤매다가 희망의 끈을 붙잡고 기사회생하는 수많은 개인적 삶도 지켜보았다.

 낙관이 비관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모습들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아. 인생은 영화 같구나….’

  광복 후 우리 70년의 세월은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 그 이전 외세침략·망국·식민지배의 근대사도 극적이지만, 1945년 8·15 광복 후 분단·건국·전쟁·가난·독재·민중봉기·쿠데타·경제성장…, 이어 10·26, 12·12, 5·18, 6·29를 거치면서 이뤄진 민주화, 그리고 지금 정보화 사회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게 전개된 우리 현대사 안에는 인간사의 모든 희로애락 이 담겨 있다. 지구상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로 원시농업사회 모습까지 잔존했던 우리나라가 첨단 정보사회로 탈바꿈하기까지 과정에는 전 인류사가 농축돼 있다.

 궤도 이탈도 있었고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부조리도 있었지만, 국제사회도 인정하듯이 ‘기적의 역사’요 발전을 거듭했던 ‘축복받은 시간’이었다.

 모처럼 우리 현대사를 넉넉하게 다룬 영화가 나왔다. 바로 윤제균 감독·황정민 주연의 ‘국제시장’이다. 주인공 덕수 일가족이 한국전쟁 초기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미군 배를 타고 함경도 흥남에서 탈출한 뒤 겪는 부산 피란 생활, 가난, 서독 광부, 베트남 파병, 이산가족 찾기 등등은 이 풍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한국인들의 자화상이었다.

 우리의 아버지·어머니·누나·형들이 있었고, 여기에 깜짝 등장하는 현대건설 초기 정주영을 비롯해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가수 남진, 천하장사 이만기의 젊은 시절 모습들….

 때로 투박스럽기도, 때로 국가주의적 측면도 보이지만 이 영화는 우리 마음을 크게 울렸다. 삶이나 영화나 마찬가지겠지만 감동은 미움, 불신, 부정적 논리보다는 사랑, 신뢰, 긍정적 정서에서 나온다.

 이 영화가 팍팍한 내 마음을 치고 들어온 것은 지금은 사라지고 과거엔 존재했던 것, 곧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 때문이었다.

 피란 때 아빠를 잃은 소년가장으로서 덕수는 공부 잘하는 남동생을 위해 선장이 되겠다는 자기의 꿈을 접고, 독일 광산촌 막장생활을 자원했다. 여동생 결혼 자금을 위해 베트남전에 기술자로 나갔다가 다리에 총상을 맞고 불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평생 자신이 아닌 가족만을 위해 살아왔다.

 덕수의 이런 희생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섭섭해하는 아내 영자(김윤진). 이런 저런 문제로 동네 한 귀퉁이에서 언쟁을 벌이던 도중 오후 5시 국기하강식이 시작되자 언쟁을 그만두고 주춤주춤 일어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은 씁쓰레하면서도 코끝을 찡하게 하는, 그때 그 시절 우리 모두의 서글픈 모습들이었다.

 과거에는 이토록 가족이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지금은 곁에서 등 토닥거려 주는 것도 인색한 개인주의 사회가 됐다.

 이런 점에서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천국이자 전 세계 민족이 몰려와 사는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영화계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가족·사랑·봉사·공동체·애국심을 고취시킨다. 결국 선 이 악 을 이긴다는 ‘뻔한 스토리’로 사람들을 울린다. 그래서 비록 험한 세상이긴 하지만 살아갈 만하다는 꿈과 희망을 던져 준다.

 어차피 인생은 현실(reality)과 공상(fantasy)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영화는 지금 꿈을 잃어 가는 우리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함영준 한국문화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