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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새해 특별 기고

소설가 김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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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해 12월 30일 평소 자전거를 타곤 하는 경기도 파주 공릉천을 찾은 소설가 김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는 본래 어둡고 오활하여, 폐구(閉口)로 겨우 일신을 지탱하고 있다. 더구나 궁벽한 갯가에 엎드린 지 오래니 세상사를 입 벌려 말할 만한 식견이 있을 리 없고, 이러한 말조차 아니함만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하되, 잔잔한 바다에서 큰 배가 갑자기 가라앉아 무죄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태가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몸을 차고 어두운 물 밑에 버려둔 채 새해를 맞으려니 슬프고 기막혀서 겨우 몇 줄 적는다.

 단원고 2학년 여학생 김유민양은 배가 가라앉은 지 8일 후에 사체로 인양되었다. 라디오 뉴스에서 들었다.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씨는 팽목항 시신 검안소에서 딸의 죽음을 확인하고 살았을 적의 몸을 인수했다. 유민이 소지품에서 학생증과 명찰, 그리고 물에 젖은 1만원짜리 지폐 6장이 나왔다. 김영오씨는 젖어서 돌아온 6만원을 쥐고 펑펑 울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지음 『못난 아빠』 중에서) 이 6만원은 김영오씨가 수학여행 가는 딸에게 준 용돈이다. 유민이네 집안 사정을 보건대, 6만원은 유민이가 받은 용돈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이었을 것이다. 이 6만원은 물에 젖어서 돌아왔다.

 아 6만원, 이 세상에 이 6만원처럼 슬프고 참혹한 돈이 또 있겠는가. 이 6만원을 지갑에 넣고 수학여행 가는 유민이는 어떤 설계를 했던 것일까. 열일곱 살 난 여학생은 무엇을 사고 싶었을까. 얼마나 간절한 꿈들이 유민이의 6만원 속에 담겨 있던 것인가. 유민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 아버지, 엄마, 동생에게 사다 주려 했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6만원은 유민이의 꿈을 위한 구매력에 쓰이지 못하고 바닷물에 젖어서 아버지에게 되돌아왔다.

 300명이 넘게 죽었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몸이 물 밑에 잠겨 있지만 나는 이 많은 죽음과 미귀(未歸)를 집단으로 한꺼번에 슬퍼할 수는 없고 각각의 죽음을 개별적으로 애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민이의 6만원, 물에 젖은 1만원짜리 6장의 귀환을 통절히 슬퍼한다.

 아 6만원. 유민이의 마음속에서 6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유민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사소할수록 간절했을 것이다. 이것을 살까, 저것을 살까 망설일 때 그 후보 리스트에 오른 물건까지를 합산한다면 이 6만원이 갖는 구매력의 예상치, 실현되지 못한 구매력은 몇 배로 늘어난다. 유민이의 선택에서 최종적으로 탈락되었다고 해서 그 탈락된 꿈이 무효인 것은 아니다. 배는 수학 여행지에 닿지 못했다. 죽은 많은 아이들의 용돈도 다들 물에 젖어서 돌아왔을 것이므로 그 많은 꿈들은 슬픔과 분노로 바뀌어 바다를 덮는다. 유민이의 지갑에서 돌아온 6만원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국가재난 컨트롤타워에 성금으로 보내야 하는가를 생각하다가 생각을 그만두었다. 내가 젊은 날 육군에서 힘들 때 엄마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어렵고 힘들 때는 너보다 더 어려운 이 어미를 생각해라, 라고 적혀 있었다. 고지의 겨울은 맹수에게 물어뜯기는 듯이 추웠다. 엄마의 편지를 받던 날 밤에 나는 보초를 서면서 고난을 따스함으로 바꾸어놓는 엄마의 온도와 엄마의 눈물의 힘을 생각했고 자라나는 고비에서 치솟는 반항기로 엄마를 속 썩인 패악을 뉘우치면서 가슴이 아팠다. 유민이의 6만원에도 내 엄마의 편지처럼, 크고 깊은 슬픔의 힘이 저장되어 있어 세상의 불의와 세상의 더러움을 밀쳐낼 수 있으며, 말을 알아듣고 사물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줄 테지만 그렇게 말해 봐도 산 자들의 말일 뿐, 젖어서 돌아온 6만원을 위로할 수는 없다. 배 안을 수색하는 잠수사들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이 담요를 둘둘 말아서 배 안의 창문 틈마다 모두 막아놓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버둥거리다가 최후를 맞았다. 골든타임도 에어포켓도 컨트롤타워도 다가오는 인기척도,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화가 유근택의 ‘어떤 실내’. 어지러운 방 한가운데 노란색 사다리들이 떠 있다.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구원의 통로로 읽힌다. 2012, 한지에 수묵 색채, 146X127㎝.

 글을 쓰면서 읽은 책을 들이대는 것은 게으르고 졸렬한 수작일 테지만 나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별수 없이 책을 들먹인다.

 조선 성종 때 관인 최부(崔溥·1454 ~1504)는 제주도에 공무 출장 갔다가 부친상을 당해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났다. 그는 15일 동안 바다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중국 해안에 표착했고 북경을 거쳐 6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는 바다와 대륙에서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나운 바다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은 이렇다.

 “한 채의 이불을 찢어 여러 번 둘러 동여매고 횡목(橫木)에 그것을 묶어서 죽은 후에도 시신이 배와 함께 오래도록 서로 멀어지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표해록』 최부 지음, 서인범·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 62쪽)

 최부는 이불을 찢어서 배 기둥에 몸을 묶었고 유민이네 학교 아이들은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았다. 그 마지막 정황에서 인간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세월호는 풍랑에 깨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침몰했다. 차오르는 물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았는데, 아직 살아 있는 몸의 동작이 생명을 향해 그렇게 작동되어지는 과정의 무서움을 최부의 글을 통해 겨우 짐작한다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세월호는 풍랑에 깨지지 않고 스스로 침몰했다. 큰 배가 스스로 뒤집혀서 가라앉게 되는 배후에는 대체 얼만큼 악과 비리가 축적되어 있는 것인지, 그리고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다가 죽은 아이들과 정치적·행정적 시스템과의 그 참혹한 단절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최부가 표류했던 조선 성종 시대의 동지나 바다는 물결이 사나웠고 세월호가 항해하던 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진도 연안 여객선 수로는 물결이 높지 않았는데, 그 인기척 없는 적막강산의 풍경은 흥망과 건국, 전쟁과 재건을 거쳐온 6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어찌 그리 똑같은지, 내가 얼마 전에 진도 팽목항에 가서 눈물도 말라버린 유가족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니 부르는 소리는 수평선 너머로 퍼져 가는데 배 빠진 자리는 흔적이 없고, 바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國破浪花飛 (국파랑화비)

 海暮號哭散 (해모호곡산)

 나라는 깨지고 물보라 날리니

 바다는 저물고 곡소리 퍼진다.

 <두보(杜甫)를 흉내 내 지음>

 장한철(張漢喆·1744 ~?)은 조선 영조 연간의 제주도 선비다. 26세 때 서울 가서 과거를 보려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났다. 그는 오키나와까지 떠밀려갔다가 중국 상선을 얻어 타고 2개월 만에 돌아왔다. 29명 중에서 22명이 물에 빠져 죽었고, 살아서 돌아온 자들도 곧 병들어 죽었다. 부서진 배가 파도에 치솟고 잠기면서 장한철에게 죽음이 다가오는데,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삶을 기약한다. 그때 장한철의 각오는 다음과 같다.

 "만일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면 응당 글 읽는 일을 던져버리고 집 밖의 일도 벗어버리고 몇 고랑 안 되는 밭을 몸소 갈면서 쌍오당(둘째 아버지의 아호)의 여생을 효성스럽게 받들련다.” (『표해록』 장한철 지음, 김지홍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9, 68쪽)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장한철은 삶의 쇄신을 각오하는데, 쇄신의 골자는 책을 버리고 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언어와 관념의 세계를 버리고 몸과 대지가 부딪치고 엉키는 직접성의 세계에 삶을 재건할 것을 기약한다.

 세월호가 기울고 뒤집히고 가라앉을 때 배에 갇힌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한 방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고유한 원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 물이 차오르는구나, 이제 죽어야겠다, 라면서 죽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세월호에서 죽은 그 많은 사람들도 장한철처럼 죽음 앞에서 삶의 쇄신을 기약했을 것인데, 그들의 마음속에서 울음으로 끓어오르던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와 동경, 지나간 삶에 대한 회한과 뉘우침, 이루어야 할 소망과 사랑과 평화와 친절, 만남과 그리움, 손 붙잡기, 끌어안기 쓰다듬기….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팽목항에서 나는 기막혔고 분했다.

 장한철의 그 일생일대의 각오는 오래가지 못했다. 살아서 돌아온 그는 다시 글의 세계로 돌아갔다. 풍랑 치는 바다에서의 생각과 흔들리지 않는 땅 위에서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이다. 장한철은 살아온 지 두어 달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과거에 응시했고, 떨어졌다. 낙방한 그가 다시 배를 타고 제주 바다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갈 때 책과 밭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장한철은 살아서 돌아왔으므로 그의 마지막 각오와 소망을 번복할 수 있었겠지만, 세월호에 갇혀 죽은 사람들은 돌아와서 번복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들의 마지막 소망은 영원히 유효하다. 그 유효한 소망들이 바다와 육지 위에서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떠돌고 있지만, 소망들은 유효하다.

 세월호는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체를 불법으로 증축했고, 배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평형수를 빼냈고, 갑판 위의 화물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 복원력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쏠려서 침몰한 것이라고 검찰은 수사결과를 밝혔다. 검찰은 이 부분을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검찰의 말은, 한마디로, 세월호는 물리법칙을 위반했기 때문에 침몰했다는 것인데, 지구 중력의 자장 안에서 물리법칙을 위반하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월호는 가라앉을 만해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졸작소설 『칼의 노래』를 쓰느라고 선박과 항해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내가 읽은 책들은 들이댈 만한 것도 아니고 내가 쓰려는 소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바다의 질감과 선박의 작동원리를 전혀 모르고서는 글을 쓸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백면서생이 배의 작동원리를 말하는 것은 꼴 같지 않지만 무릅쓰고 가려 한다.

 20세기의 대형 선박은 모두 쇠로 만든다. 쇠가 어떻게 물에 뜨는가. 쇠건 바위건 나무토막이건 같은 용적의 물보다 가벼우면 뜨고, 무거우면 가라앉는다. 이 세상의 모든 배를 지칭하는 영어 보통명사는 베슬(vessel)인데 그릇이라는 뜻이다. 그 자체에 용적을 포함하고 있는 운송수단이라는 말이다. 수만t의 쇳덩어리는 베슬을 이룸으로써 가라앉으려는 중력과 띄우려는 부력이 길항(拮抗)하면서 물에 뜬다. 이것은 소금쟁이가 물에 빠지지 않는 이치와는 전혀 다르다. 이 길항의 원리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나오는 신석기 사내들의 고래잡이용 보트(내가 좋아하는 그림!)나 생환율이 50%에 불과했던 16세기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의 범선이나 명량해전, 노량해전, 한산해전, 옥포해전에서 이긴 이순신 함대의 판옥전선이나 두 동강 난 천안함이나 방위 예산 떼어먹은 통영함이나 멀쩡히 가다가 가라앉은 세월호나 다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예외는 없고 예외는 곧 죽음이다. 무게중심과 부력중심이 서로를 피하고 또 달래가면서 기우는 배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데 이 양극단의 모순이 한순간의 물리현상 속에서 통합됨으로써 배는 롤링하면서 전진한다. 그러나 배가 옆으로 기울 때 이 경사각도가 모순을 통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면 복원력은 순간에 소멸하고 배는 뒤집혀서 침몰한다. 배는 유(柔)로서 강(剛)을 다스리며, 유와 강의 종합으로써 롤링하고 피칭하는데, 배가 롤링과 피칭 없이 뻣뻣하게 파도를 대하면 배는 바로 깨지거나 침몰한다.

 이순신 함대의 배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한선(韓船)은 연안 항해용이기 때문에 바닥이 평평해서 큰 파도를 만났을 때는 복원력이 약하다. 그래서 한선은 무거운 화물을 배 밑바닥에 싣고, 화물이 모자랄 때는 바위를 실어 무게중심을 낮춘다. 목포해양박물관에 전시된 신안 보물선도 모든 화물을 배 밑창에 싣고 있다. 이것은 아무런 비밀도 아니고 전문지식도 아니다. 고대 이집트의 갈대배에서부터 적용되던 원리다.

 세월호는 이 모든 원리와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거꾸로 했다. 그러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갑판에 과적을 함으로써 무게중심을 위로 끌어올렸고, 배 밑창의 평형수를 빼버려서 배의 중심을 허깨비로 만들었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인가. 이것은 원인이라기보다는 침몰 그 자체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배가 뒤집혀지니까 가라앉았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세월호 침몰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화물을 단단히 묶지 않았다는 것이다. 검찰이 그렇게 말했다. 기울어진 세월호의 사진을 보면 갑판 위에는 컨테이너고 승용차고 아무것도 없이 빗자루로 쓸어낸 것처럼 깔끔하다. 배가 기울 때,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려 물속으로 휩쓸려 내려간 것이다. 화물을 단단히 묶지 않았다는 수사결과는 맞는 말이다.

 화물을 단단히 묶는 것을 고박(固縛)이라고 하고, 원양선원들의 전문 용어로는 래싱(lashing)이라고 하는데, 다 같은 말이다. 이것도 별것이 아니다. 지게꾼이 옹기를 묶을 때, 1.5t 픽업트럭 기사가 적재함의 짐을 묶을 때, 퀵서비스 오토바이 기사가 뒷자리의 박스를 묶을 때 그리고 앞에서 썼듯이 조선 성종 때 바다에서 죽음을 맞는 최부가 이불을 찢어서 몸을 선체에 묶을 때, 이 모든 동작이 래싱이다. 래싱은 흔들리면서 길을 가는 모든 자들의 기본동작이다. 별것이 아니지만, 이탈자는 살길이 없다.

 그래서 원양을 항해하는 선박의 갑판원들은 쉴 새 없이 갑판을 순찰하면서 컨테이너를 묶는 쇠줄(래싱바)을 스패너로 조인다. 이것이 갑판원의 기본 업무다. 컨테이너는 선체와 밀착되어 롤링과 피칭을 함께 해야 하며, 컨테이너가 정위치를 이탈해 한쪽으로 쏠리면 그 기세로 배 전체를 끌고 쓰러져서 살길은 없어진다. 운동은 복원되지 않는다. 세월호는 등짐 지는 지게문만큼도 래싱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월호가 래싱을 엉터리로 해서 침몰했다는 말도 또 다른 동어반복이다. 비를 맞으니까 옷이 젖었고, 밥을 굶었더니 배가 고프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세월호는 왜 기울었고 왜 뒤집혔는가.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이후로 사태를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시각은 발작적인 분열을 일으키며 파탄되었다.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간직해서 미래를 지향하는 동력으로 가동시켜야 한다는 시각과 그 슬픔과 분노를 매우 퇴행적인 소모적인 것으로 여겨 혐오하는 시각이 교차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4월, 5월까지는 전자의 시각이 우세했으나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적지 않은 재미를 보고, 이어 7월 30일 재·보선에서 여당이 압승하자, 후자의 시각이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슬픔과 분노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해롭다는 것이 그 혐오감의 주된 논리였다.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 거기에 이념의 날라리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사실 4·16참사 이후에 경기는 장기 침체에 빠졌고, 정부의 부양책은 힘을 쓰지 못했다. 모두들 슬프고 분하면 경기는 침체되는 것이니까. 슬픔과 분노가 경기침체의 원인이라는 말도 결국은 동어반복이다. 어찌 헌 옷을 벗듯이, 헌신짝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의 일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돈 많고 권세 높은 자들이 큰 죄를 저질러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형량을 줄여서 선고하고, 형기 중에도 특별사면, 일반사면, 집행정지, 가석방, 병보석으로 풀어주는 무법천지를 나는 자유당 때부터 보아왔고 자유당은 지금도 특별사면 중이다. 죄형법정주의는 무너졌고 경제는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토대를 상실했다.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벗어 던져야만 먹고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법치주의가 살아 있어도 법이 밥을 먹여줄 리는 없고, 밥은 각자 알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것인데, 법치주의를 포기해야만 밥을 벌어먹기가 수월해진다면 이 가엾은 중생들의 밥은 얼마나 굴욕적인 것인가.

 나는 수감 중인 대기업 총수에 대한 가석방 결정이 법무장관의 ‘고유권한’이라는 언설에 반대한다. 장관이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의 고유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사금(尼師今)이 아니고 마립간(麻立干)이 아닐진대, 어찌 직무에 따른 권한이 그 직위에 ‘고유’하게 귀속될 수가 있겠는가. 장관은 다만 그 가석방이 법치주의의 원칙과 절차에 비추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공적으로 판단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을 풀어주면 이 나라가 얼마큼 더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인가는 법무장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장관의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없다. 자유당 때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무법천지의 관례도 장관이 참조할 전례가 되지 못한다. 저 사람을 지금 풀어주면 이 나라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무너져 내리며, 후세의 더 큰 무너짐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어떠한 앞날이 닥쳐올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장관의 일이기를 나는 바란다.

 지금, 그날 벌어 그날 먹거나 한 달 벌어서 한 달을 먹거나, 사람들은 먹고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다. 이 겨울에 살기 위한 아무런 방편도 마련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중생고(衆生苦)가 수감 중인 대기업 총수의 석방 주장을 정당화하고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지만, 기막히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4·16의 슬픔과 분노는 전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정치의 악다구니 속으로 편입되었고,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편으로 갈라져서 치고받게 되었는데, 세종로에서 단식을 이어가던 유가족들 옆에서 먹성 좋아 보이는 청년들이 통닭과 짜장면을 먹어대고, 또 국회의원 명함을 내미는 웬 여성의원이 대리운전기사를 폭행하는 짓에 연루됨으로써 이 악다구니와 악다구니에 편승하는 또 다른 악다구니들이 온 나라에 넘쳤다. 슬픔과 분노의 온전한 모습은 파괴되었고 유민이의 젖은 6만원의 의미는 실종되었다. 그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가 없어서 끔찍한 재앙을 당한 소수자의 불운으로 자리 매겨졌다. 그 소수의 고통을 사회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다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고 다수가 먹고사는 일이 해로운 결과가 된다고 힘센 목청을 가진 언설의 기관들이 힘을 합쳐서 소리 질렀다. 소리 질러서 낙인찍었고,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해서 4·16의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 없어서 재난을 당한 소수자의 것, 우는 자들만의 것, 루저들만의 것으로 밀려났다.

세월호가 침몰한 사건과 그 모든 배후의 문제를 다 합쳐서 세월호 제1사태라고 한다면, 제1사태 직후부터 이 나라의 통치구조 전체가 보여준 붕괴와 파행은 세월호 제2사태다. 이것은 또 다른 난파선이다. 제1사태와 제2사태는 양태는 다르지만 뿌리가 같아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는데, 과거의 제2사태가 오늘의 제1사태로 터져 나오고, 오늘의 제2사태가 미래의 제1사태를 예비하고 있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은 제1사태 때 승객과 배를 버리고 먼저 탈출했다. 이준석 선장은 36년 형을 받았다. 세월호 제2사태에서도 많은 책임 있는 자들이 난파선을 버리고 탈출했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이준석을 욕함으로써 자신들의 탈출의 오욕을 희석시키고 있다. 이 난파선은 아직도 표류 중이다. 세월호특별법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고통과 슬픔을 향해 얼만큼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지, 어느 정도에서 발을 빼야 하는지를 놓고 다투다가 여야 합의는 거듭 난파되었고 야당의 리더십은 침몰했다. 대통령은 사건 당일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일곱 시간 동안 일곱 번이나 각급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비서실장이 밝혔다. 그런데 현장의 구조 인력은 기우는 배에 접근하지 않았고, 해경 책임자는 구조 인력 투입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대통령의 명령은 대체 무엇인가. 명령이란, 복종되고 실현되기를 강요하는 의사 표시다. 대통령의 직무는 언어의 형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명령이 요구하고 있는 내용을 현실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명령은 직무의 발동이고 실현은 직무의 완수다. 이것이 대통령과 9급의 차이일 것이다. 명령을 일곱 번 내렸다고 해서 대통령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명령은 허공으로 흩어졌는지, 대통령의 명령이 구중궁궐에 갇힌 대왕대비의 신음처럼 대궐 담 밖을 넘지 못한 꼴이니, 그 나머지 일들은 기력이 없어서 더 말하지 못한다.

 연초에는 세월호특별법에 따른 위원회가 결성되어 진상조사, 재난 예방과 대처, 희생자 위로 등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세월호 사태는 제3의 국면으로 접어드는 셈이다. 위원회는 법이 정한 바에 따라 한시적인 기구가 되었지만, 이 같은 일에는 시한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를 도려내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세월호를 내버리고 가면 우리는 또 같은 자리에서 물에 빠져 죽는다. 우리는 새로 생기는 위원회를 앞세워서, 세월호를 끝까지 끌고 가야 한다. 위원회가 동어반복으로 사태를 설명하지 말고 그 배후의 일상화된 모든 악과 비리, 무능과 무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공생관계를 밝히는 거대한 사실적 벽화를 그려주기 바란다. 그리고 유민이의 젖은 6만원의 꿈에 보답해주기 바란다. 나는 사실 안에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사실의 힘에 의해 슬픔과 분노가 미래를 향한 희망의 동력으로 바뀌기를 바란다. 바르고 착한 마음을 가진 많은 유능한 인사들이 이 위원회에 참여해주기를 나는 바란다. 삶을 쇄신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 외부 필자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김훈은… 소설가이자 자전거 레이서.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영문과 중퇴. 한국일보·시사저널·한겨레신문 등에서 3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했다. 불혹을 한참 지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힘 있는 문체, 역사적 인물들의 흔들리는 내면에 대한 묘사로 특히 중장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2001년 작 『칼의 노래』는 100만 부 이상, 2007년 작 『남한산성』은 60만 부 넘게 팔렸다. 장편 『현의 노래』 『공무도하』, 소설집 『강산무진』, 산문집 『선택과 옹호』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 1·2』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황순원문학상·대산문학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