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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이대로 가면 남북 모두가 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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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북한 사회주의는 올해 70년째를 맞아 가장 장기간 사회주의를 운용했던 소련의 기록인 73~74년에 근접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수의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현재 북한 체제가 계속 존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북한은 다른 사회주의와는 다르다는 이른바 ‘북한 예외론’이다.

 그러나 역사의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1990년대 북한 붕괴론의 오류는 ‘경제 결정론’, 즉 경제가 무너지면 정권이 붕괴된다는 순진한 인과관계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성장률로 보면 붕괴 직전까지 소련은 미미하지만 성장을 하고 있었다. 소련의 붕괴는 심각한 소비재 부족과 비공식 경제활동으로 인해 사람들의 의식과 믿음, 행동이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통치 권력 사이의 균열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가계소득 중 80%를 차지하는 북한의 시장경제 활동 수입은 북한 주민의 의식을 근저에서부터 변화시키고 있다. 탈북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은 탈북민을 대상으로 이들의 시장경제 지지도를 살펴본 연구에 따르면 북한 거주 시 시장 소득이 많을수록, 또 소득이 높을수록 사회주의 원리보다 시장경제 원리를 더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공산당원 여부, 이념 학습 정도는 사회주의 지지와 무관했다. 즉 시장경제 활동으로 주민의 의식은 시장경제 원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변하는 반면 공산당원·생활총화 등 북한의 이념 기제는 이를 막기에 무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은 인간 본성이요, 역사의 법칙이다.

 북한의 변화는 중간 관료의 의식과 행동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들의 공식 월급은 월 3000원 정도이나 북한에서 4인 가족이 생활하려면 30만원가량이 필요하다. 이 차이의 상당 부분을 이들은 뇌물로 채우고 있다. 북한 가계 지출 중 10%가량이 뇌물로 쓰일 만큼 북한은 뇌물 공화국이다. 뇌물은 경제활동에 윤활유 역할을 하고 중간 관료의 생계를 유지해 주기 때문에 체제 안정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뇌물 때문에 관료는 통치 권력의 의지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 2009년의 화폐 개혁은 시장 단속 지시를 중간 관료들이 시장 참여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제대로 집행하지 않자 이에 좌절한 북한 정권이 패착을 둔 것이다. 이와 같이 북한에서는 위에서의 명령이 밑에까지 집행되는 통제구도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북한 체제의 변화 요인은 상층부에서도 발견된다. 이른바 와쿠라고 불리는 무역권은 다른 기업에 이를 임대만 해도 매출액 10%가량의 커미션을 받을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북한의 최고통치자가 결정하는 이 무역권을 둘러싸고 핵심 권력 간 암투가 치열하다. 2013년 말의 장성택 처형도 무역권을 독식하는 장성택을 제거함으로써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북한 최상층 권력이 반(反)장성택 연합전선을 편 결과다. 그러나 통치 엘리트 사이의 갈등은 정권 붕괴의 격발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도 이 경향의 예외가 되기는 어렵다.

 김정은 정권 3년 동안 북한 경제가 양의 성장률을 보인 것은 사실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성장은 북한 정권의 정치적·이념적 기반의 침식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결과다. 북한 주민의 시장활동, 중간 관료의 뇌물 수수, 북한 상층부의 무역권을 둘러싼 갈등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역사의 법칙이 북한에도 적용될 것임을 시사한다. 불행히도 북한 정권은 여전히 이를 알지 못하고 북한식의 경제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불행한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만약 북한에 급변사태가 일어난다면 이를 행복한 통일로 이끌 역량이 아직 우리에게 없다. 필자가 평가하건대 우리의 통일 역량은 기껏해야 D학점이다. 사회적 역량과 정치 역량은 F학점에 가깝고 경제와 외교 역량도 D학점 정도다. 이 역량을 제고하는 것이 급선무이나 그 가능성은 차치하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남북 관계를 정상화하며 북한 경제를 개발함으로써 경제를 통해 북한 정권의 취약성과 도발성을 제어하는 것은 너무나 절박한 과제다.

 2015년 을미년 새해는 역사의 변곡점이 될 수 있는 해다. 박근혜 정부가 남북 관계에 새로운 시작을 이뤄 내려는 치열한 의지를 갖고 새해를 맞기 바란다. 북한 경제뿐만 아니라 경제사와 금융 전문가도 대통령과 정책결정자를 직접 만나 우리의 전문성과 역량을 총동원한, 창의적인 대북 경제정책을 구상해야 한다. 정상회담도 역사에 도움이 되면 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남북 모두 패자가 될 가능성만 커지기 때문이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