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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메르켈의 긴축이 만든 긴축 반항자 치프라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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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그리스의 안토니오 사마라스 총리가 지지한 대통령 후보가 29일(현지시간) 의원 180명(정원 300명)의 지지를 받는데 실패했다. 이로써 세 번의 기회가 모두 날아갔다. 그리스 헌법상 의회에서 대통령 선출에 실패하면 남은 건 조기 총선이다. 내년 1월 25일 투표가 이뤄질 전망이다. 그날 판도라 상자가 열린다. 옛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에선 질병과 슬픔 등이 뛰쳐나왔다. 그렇다면 이번엔 무엇이 나올까.

 그리스 영자지 카트메리니는 “지난주 말 여론조사 결과 알렉시스 치프라스(40)가 차기 총리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이날 전했다. 치프라스란 새로운 정치 리더가 판도라 상자에서 뛰쳐나올 것이란 얘기다. 치프라스는 좌파연합(시리자)의 당수다. 중도 우파인 사마라스의 연립정부 파트너인 중도 좌파인 사회당(PASOK)과 구분하기 위해 ‘급진좌파연합’으로 불린다. 말 그대로 그의 당엔 온갖 좌파들이 모여 있다. 마오쩌둥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좌파 포퓰리스트, 사회민주주의자, 유로비관론자 등이다.

 그들은 도시 게릴라처럼 활동하며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에 찌든 그리스 대중을 끌어들였다. 유럽통합 전문가인 안병억 대구대 교수는 “시리자가 (기존 사회당과는 달리) 풀뿌리를 장악했다”며 “이는 다가오는 총선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시리자는 2012년 6월 총선에서 약 27%를 득표했다. 현 집권 신민당은 29.7%를 얻었다. 시리자의 최근 지지율은 33~35% 정도다. 당장 총선이 실시되면 시리자가 제1당이 될 수 있다. 헌법상 50석을 보너스로 받는다.

 블룸버그 통신은 “그렇다고 시리자가 과반 151석을 확보하긴 힘들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라고 했다. 중도 좌파인 사회당 등 군소정당 또는 우파인 신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톰슨로이터는 이날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내년 1월 총선 결과가 애매해 시리자나 신민당이 주도한 연립정부가 구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면 재선거다. 이미 2012년에 한 차례 경험했다.

 치프라스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면 마흔 한 살의 나이에 총리가 된다. 블룸버그 통신은 “치프라스가 총리자리에 오르는 일은 그리스뿐 아니라 유로존 리더와 재계 등이 가장 꺼리는 시나리오라”라고 했다. 실제 29일 의회 표결 직후 아테네 주가가 10% 이상 폭락했다. 그리스 국채값도 뚝 떨어졌다. 10년만기 국채 금리는 연 10% 선에 육박했다.

 최악의 반응은 뱅크런(예금 인출사태)이다. 거의 모든 예금이 유로화여서 순식간에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갈 수 있다. 치프라스는 이날 표결 직후 “시중은행의 예금 전액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현실에 기민하면서도 유연하게 대응하는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비록 치프라스가 유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시장이 충격을 받은 건 그의 본질을 알기 때문이다. 치프라스는 비타협적인 인물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는 2012년 총선 이후 중도 우파나 좌파와 손잡기를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유지해왔다”고 소개했다. 그해 선거 다음날인 6월 18일 지지자들 앞에서 “우리의 원칙과 노선을 펼칠 수 있는 날이 몇 년 안에 온다”고 공언했다.

 그로부터 2년 반 정도 만에 그의 말은 실현될 조짐이다. 그가 말한 원칙과 노선이란 부채 원리금탕감, 재정긴축·정리해고 거부다. 트로이카로 불리는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이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요구한 핵심 정책에 대한 거부다.

 그렇다고 치프라스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탈퇴(Grexit)를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는다. 대신 최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트로이카와 재협상을 요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협상 자체도 유로존 맹주인 앙겔라 메르켈(60) 독일 총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카드다. 트로이카를 통해 관철시킨 독일의 재정위기 처방과 정책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어서다. 게다가 메르켈 자신의 철학에도 어긋난다.

 찰스 달라라 전 국제금융협회(IIF) 사무총장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메르켈은 청교도적 선악의 잣대로 경제 현상을 판단한다”며 “능력 이상의 부채는 메르켈의 눈에 부도덕한 행위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런 메르켈에게 치프라스가 주장하는 재협상을 통한 부채 원금탕감은 부도덕한 행위다. 아니나 다를까. 29일 오후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이 “그리스가 선거 뒤에 노선을 바꾼다면 지원이 어렵다”고 미리 못 박았다.

 안병억 교수는 “비타협적인 메르켈의 태도가 강경 좌파인 치프라스 등장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고강도 긴축과 정리해고가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을 야기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그리스인들이 치프라스의 시리자를 더 지지하게 됐다는 얘기다.

 현재 그리스의 실업률(9월)은 25%를 웃돌고 있다. 2년 정도 디플레이션에 빠져있다. 최근 경제가 조금씩 회복하고 있지만 실업률과 디플레이션을 완화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스는 2010년부터 트로이카로부터 받은 구제금융 2400억 유로(약 320조원)를 감당하기 버겁다. 아직도 국내총생산(GDP)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170%에 이르기 때문이다. FT와 톰슨로이터 등은 “그리스 경제 상황에 비춰 제2차 헤어컷(부채삭감)을 피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라고 전했다.

 1차 헤어컷은 달라라 IIF 사무총장 주도로 2011년 10월에 실시됐다. 민간 채권자들이 원금과 이자 50%를 깎아줬다. 당시에 트로이카는 참여하지 않았다. 치프라스가 말하는 원금 탕감은 바로 트로이카 구제금융 일부 탕감이다.

 치프라스와 메르켈의 원금탕감 협상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톰슨로이터는 “강경한 양쪽이 정면 충돌하면 불확실성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악의 불확실성은 바로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이다. 치프라스와 메르켈의 밀고 당기기에 유로존 운명이 달려 있는 셈이다.

강남규 기자

◆알렉시스 치프라스=1974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아테네국립기술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했다. 80년대에 공산주의 청년조직에서 활동했다. 좌파 주류인 사회당보다는 더 왼쪽인 조직이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섰다. 3년 뒤인 2009년에 시리자 당수로 선출됐다. 또 3년 뒤인 2012년 총선에서 시리자를 제2당으로 키웠다. 남미 혁명가인 체 게바라를 흠모해 막내 아들의 중간 이름을 게바라의 본명인 에르네스토로 정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과 만나는 등 해외 활동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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