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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새로워야 대중음악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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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연말이라 그동안 보지 못했던 동창들을 만난 탓일까. 자주 옛날 추억에 잠기게 되고 그 시절 즐겨 불렀던 노래들을 찾아서 듣기도 한다. ‘한동안 뜸했었지’의 드럼 비트는 여전히 흥겹고, 김광석의 노래는 지금 들어도 가슴이 아리다. 옛날을 추억하는 것이 늙어가는 증거라고들 하는데. 그래도 어쩌랴. 그때를 생각하자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호기가 느껴지고 아직도 잊히지 않는 낭만에 사로잡히니 말이다. 이래저래 유튜브를 찾는 일이 많아지는 요즈음이다.

 몇 년 전 ‘건축학 개론’으로 시작된 복고의 바람은 금년에도 한껏 맹위를 떨쳤다. 영화와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까지 모두 경쟁적으로 왕년의 추억을 상품화하느라 바쁜 한 해였다. 복고 바람은 대중음악에서 특히 거셌다. 단순히 왕년의 스타들이 컴백하거나 몇몇 곡을 리바이벌하는 정도를 넘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1990년대 가요를 부르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그렇게 보자면 우리 문화계는 올 한 해 동안 과거에 기대서 ‘먹고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나쁠 리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모든 과거가 아름답기만 했던 것일까.

 오래된 과거의 가치를 찾아내는 일을 역사라 하고, 아직 기억하고 있는 가까운 과거를 불러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복고다. 추억에 매달리다 보면 그것을 지나치게 미화하게 되고 앞으로 나가려는 힘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전진하지 못할수록 과거에 대한 향수는 더욱 진해질 수밖에. 일종의 퇴행적 악순환이다. 정치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다. 이러한 우려는 나만의 생각만은 아닌 듯하다. 사이먼 레이놀즈는 책 『레트로 마니아』에서 대중음악의 미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바로 자신의 과거라고 말한다.

 대중음악이야말로 늘 새롭게 변화하는 음악이다. 오죽하면 대중가요의 이름이 유행가일까. 지금은 고리타분하다는 의미가 된 신파(新派)조차도 그것이 만들어지고 유행되던 당시에는 뉴 웨이브였다. 트로트는 또 어떤가. 한때는 “슬로, 슬로, 퀵, 퀵”의 폭스트로트 춤리듬이 신민요에서 느낄 수 없었던 최첨단 문물의 신선함을 선사했으리라. 칙칙한 리듬앤드블루스에 신나는 비트를 더했을 때 로큰롤이 탄생했고 상업화된 록에 반발해 펑크가 나왔다. 비주류의 반항이라 가능했던 것이 힙합이다. 도전과 변화가 없는 대중음악은 대중음악이라 부르기 어렵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힘을 잃어버린 대중음악은 자연스럽게 과거로 퇴행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추억만을 팔고 있는 대중음악은 퇴폐적이다. ‘불후의 명곡’들을 정해놓고 연주와 해석만 바꾸는 음악은 이미 클래식만으로 충분하다.

 그 태생부터 젊음을 위한 젊은이의 음악이 바로 대중음악이다. 대중음악의 청중은 언제나 20대를 넘지 않는다. 가장 심장이 뜨겁고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되는 그때에 대중음악을 제일 왕성하게 소비하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은 젊음이 양분이다. 청춘의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있기에 반항도 자유도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가 노령화되다 보니 문화도 노령화되는 모양이다. 시험에 치이고 취업에 절망한 젊은 세대들이 음악에서조차 일탈이나 저항을 포기한 채 자신은 경험하지도 않은 과거로 회귀한다. 향수를 느끼지 않아야 청춘인데 말이다. 현재의 청춘들을 과거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는 없을까. 이들에게도 자신들만의 현재가 필요하니까. 아픈 청춘이라지만 지나고 나면 소중한 추억이다. 이들에게서 현재를 빼앗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여기저기서 한 해를 결산하는 가요대전과 송년 음악회가 한창이다. 한 해를 정리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동안의 도전에 대한 격려와 축하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과거가 우리를 위로할 수는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지는 못한다. 해가 바뀔 때마다 더 젊어지지 못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새해에는 대중음악에 미래를 향한 창조와 도전이 넘쳐나길 바란다. 불러내야 할 것은 선배들의 노래 자체가 아니라 젊은 시절 그들의 실험과 혁신이다. 지금 우리 청년들이 느끼는 삶과 보람, 불안과 희망을 노래할 수 있도록. 새 술에는 새 부대가 필요하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