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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198억원 마다하고 36억원에 고향팀 복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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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구로다가 미국 메이저리그 팀들의 거액 제의를 뒤로하고 일본 친정팀 히로시마로 복귀한다. 일본 언론들은 ‘돈보다 의리’라고 극찬했다. 뉴욕 양키스서 역투하는 구로다. [중앙포토]

2006년 10월 16일,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마지막 홈 경기가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열렸다. 팀 성적은 센트럴리그 6개 팀 중 5위에 그쳤지만 팬들은 일본시리즈를 응원하는 것처럼 큰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히로시마의 오른손 투수 구로다 히로키(39)의 등번호(15번)가 적힌 카드를 들고 있었다. 내야석 광고판보다 몇 배 큰 플래카드를 펼친 뒤 다함께 문구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 싸웠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 눈물이라도 되어주겠다. 카프의 에이스 구로다 히데키.”

 당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구로다는 이적을 준비하고 있었다. 1997년 가난한 시민구단에 입단한 그는 2006년까지 91승81패를 기록하며 ‘꼴찌팀의 에이스’로 큰 사랑을 받았다. FA가 됐으니 부자 구단으로 떠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구로다는 히로시마 팬들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FA 권리를 포기하고 히로시마에 남기로 한 것이다. 그는 “내가 다른 유니폼을 입고 히로시마 선수를 상대로 공을 던지는 걸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허용해 달라는 조건만 달았다. 만화 같은 이야기는 이듬해 일본에서 진짜 만화로 출간(『누군가를 위해서-구로다 히로키 이야기』)됐다.

2006년 히로시마 팬들이 구로다 히로키를 응원하는 플래카드를 펼치고 있다. 구로다는 “힘이 남아있을 때 히로시마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이를 지켰다. [중앙포토]

 구로다는 2007년 12승(8패)을 히로시마에 안긴 뒤 LA 다저스와 계약했다. 그리고는 “힘이 남아 있을 때 일본으로 돌아오겠다. 물론 히로시마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미 전성기가 지난 나이(만 33세)였지만 그는 다저스가 제안한 4년 계약 대신 3년 계약(총 3530만 달러·약 390억원)을 선택했다. 다저스에서 3년간 28승(30패)을 올린 구로다는 2011년 1200만 달러(약 130억원)에 재계약했다.

 그는 2010년부터 올해까지 5년 연속 10승 이상을 거뒀다.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전체 피칭의 60% 이상이 빠른 공(포심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 컷 패스트볼)이다. 몸이 유연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독하게 훈련하고,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다. 세계 최고의 투수로 성장한 클레이튼 커쇼(26·다저스)는 “4년간 지켜본 히로(구로다)는 존경심을 갖게 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2012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그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다저스도, 양키스도 그에게 다년 계약을 제시했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1년 계약만 선택했다. “난 나태해지고 싶지 않다. 등판할 때마다 나를 완전하게 불태우고 싶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의 공포감을 유지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비경제적’ 선택을 한 그는 항상 은퇴를 각오하며 던졌다.

 올해도 11승9패, 평균자책점 3.71을 기록하자 양키스는 시즌이 끝나기 전부터 구로다에게 재계약 의사를 밝혔다. 샌디에이고는 연봉 1800만 달러(약 198억원)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흔 살을 앞둔 구로다는 또다시 ‘비경제적’ 선택을 했다. 8년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히로시마 복귀를 결정한 것이다. 그는 “히로시마 유니폼을 입고 던지는 건 내 야구 인생의 마지막 결단이자 도전”이라고 말했다.

 스포츠닛폰 보도에 따르면 구로다의 내년 연봉은 4억엔(약 36억5000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받을 수 있는 돈의 20%도 되지 않는다. 이번에도 구로다는 1년 계약을 했다. 돈이 아닌 마음을 따라간, 그다운 선택이었다.

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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