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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1)6기생-제79화 육사졸업생들(8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6기생은 민간에서 뽑은 5기와는 달리 각 연대의 우수하사관과 사병 가운데서 선발됐다.
현역들이었기 때문에 신병기초훈련은 생략되고 약3개월의 단기 사관교육만으로 졸업, 임관했다.
48년 5월5일 2백77명이 입교해 그중 2백35명이 7월28일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후보생의 선발은 각 연대에서 추천된 하사관과 사병들을 국어·국사·영어·수학·논문 등 필기고사와 구두시험 신체검사를 실시해 뽑았다. 약 4대1의 경쟁이었다. 각 연대에서의 예심을 감안하면 결코 쉽지않은 경쟁이었다.
성분을 보면 역시 이북에서 월남한 반공우익청년들이 다수였다. 일부 과거 일본군 등 경험자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경비대에 처음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해방후 우리나라에서 처음 군대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군인들끼리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불렀다.
당시 육사는 5기때와 마찬가지로 김백일중령이 교장으로 있었으며 5기생때 없어졌던 부교장 제도가 부활되어 장도영중령이 부교장이었다. 생도대장 최창언소령(군영), 교무처장 위대선소령(군영), 행정처장 우병옥대위(1기), 후방처장 황엽대위(1기), 교도대장 김기임대위(1기) 등 5기생때의 진용이 거의 그대로였다.
생도들은 5기생때와 마찬가지로 2개중대 밑에 4개구대씩 8개구대로 나뉘어 교육을 받았는데 1중대장은 박정희대위(2기), 2중대장은 강창선대위(2기)였으며 김희덕 기세원 김태규 김병화 최정호 가택림 장귀섭 윤태호중위 등 2, 3기생들이 구대장으로 후보생 교육을 맡았다. 그밖에 김동빈 김학림대위와 정종근 이희태 이건국중위 등이 교관요원으로 있었다.
일반학과 화기학교육은 전문교관이 담당, 실시했으나 전술학 등은 구대장책임아래 실시했기 때문에 구대장에 따라 교육방식이나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었다. 까다로운 구대장을 만나면 교육이 고된 반면, 요령있는 구대장을 만난 후보생들은 다소 편한 교육을 받기도 했다. 2중대 2구대장 황택림중위는 뛰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교육중에도 일절 구보를 시키지않아 다른 구대 후보생들이 황중위구대의 동료들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교육은 엄격했고 불시의 비상훈련·기합도 여전했다.
생도대장 최창언소령은 매우 깐깐한 성격으로 후보생들의 엄한 시어머니 노릇을 했는데, 한번운 한 후보생이 화기훈련중 M1 가늠자의 작은 부속 1개를 분실했다. 최소령은 전 후보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거의 한나절동안 운동장을 샅샅이 뒤진 끝에 부속을 찾아낸 다음에야 해산시켰다고 한다.
무기는 곧 군인의 생명이라는 의식을 강렬하게 심어주기 위한 기합으로 6기생들은 회고하고 있다. 5월 단오날엔 교내체육대회가 있었다. 중대 대항 기마전에서 진 2중대는 중대장 강대위의 명에 따라 전중대원이 기합을 받고 저녁을 굶어야 했다.
어느날은 주번사관이 후보생 2명에게 기합으로 연병장 구보를 시켜놓고 깜박 잊은채 잠이들어 두 후보생은 밤새 연병장을 돌았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하루는 당시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장군이 불시에 학교를 방문했다. 송장군은 전 후보생을 연병장에 정렬시켜놓고 한사람 한사람 뜯어보고 질문한 뒤 키가 작거나 신체가 허약한 사람, 기가 약해 보이는 사람 등 관상학적(?)으로 장교감이 못된다고 판단한 후보생들에게 그 자리에서 퇴교를 명령했다. 20여명이 날벼락같은 퇴교를 당했다.
신생 국군의 장교가 되려면 신오서판의 조건과 남다른 기백을 갖추지 않고는 안된다는 것이 송장군의 뜻이었던 듯 싶다.
아뭏든 교육은 고되고 힘들었다. 급식도 5기생때와 마찬가지로 나빠 후보생들은 늘 배가 고팠다. 통밀밥·고구마가 주식이었으며 부식도 콩나물국·김치가 고작이었다.
한가지, 피복에서 5기까지의 미군복 대신 국산군복이 6기생때 처음 지급됐다. 품질은 미군복에 훨씬 못미치는 조잡한 것이었지만 우리 군복을 입는다는 기쁨은 가슴 뿌듯한 감격이었다.
6기생교육의 하이라이트는 졸업 1주전 실시된 1주일간의 행군·숙영훈련이었다. 학교에서 서울역까지 차를 타고 가서 서울역에서 기차로 수원으로 간뒤 수원에서 남한산성을 거쳐 학교까지 도보로 돌아오는 훈련이었다. 중간중간 실전을 방불케 하는 공격과 방어훈련을 병행하는 행군은 7월하순의 무더위 속에 완전 무장을 하고 실시돼 젖먹던 힘까지 쏟는 고역이었다.
군수지원도 원활치 못해 식사를 재때 급식받지 못하고 끼니를 걸러가며 훈련을 했다. 그러나 모두들 젊었고 무엇보다 신생 조국의 국군 장교가 된다는 사명감이 고된 훈련을 이겨내게 했다. 「낙오자는 퇴교」라는 엄명에 지친 동료의 무장을 나누어지는 전우애를 발휘하며 단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학교에 돌아왔다.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상당수의 후보생이 졸도해 쓰러지는 소동도 있었다.
6기생들은 교육중 일부가 차출돼 동대문 변전소 경비를 맡은 일도 있었다. 이승만초대대통령의 취임식에 군부대를 대표해 6기생이 참석하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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