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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엔저 대책 없이 불황 극복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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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종윤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최근의 ‘제2차 엔저 공습’에 한국경제는 무방비 상태로 보인다.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아베노믹스가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가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의 엔저 공세 앞에 한국의 주요 산업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이 우리의 관심사가 돼야 하고, 여기에 우리의 지혜를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현재 엔화가치는 아베노믹스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2012년 10월과 비교하면 40~50% 정도 평가절하돼 있다. 한국경제는 일본과 유사한 산업구조를 갖고 있다. 일본 상품 대비 한국 상품의 가격경쟁력 약화는 과거의 경험에 비춰볼 때 한국경제에 상당한 타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로서는 가격경쟁력 저하에도 불구하고 일정 수준의 가동률 유지를 위해 지금까지와 비슷한 수준의 수량을 수출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달러 표시 인건비 등 일련의 코스트가 엔저 하의 일본 제품에 비해 높아지는데, 수출시장은 완전경쟁시장에 가까운 관계로 제품 가격을 올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제품을 수출하는 기업으로선 수익이 나지 않는 수출, 경우에 따라선 출혈을 동반하는 수출까지 감수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의 평균적인 수출기업의 상황이 이렇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되면 국민총소득의 50%를 넘는 수출의존도를 가진 한국경제는 전반적으로 악화되기 마련이다. 최근 한국경제의 침체는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수출기업들이 생존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추진하면 개별 기업들은 정상화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원 감축이나 임금 삭감이 수반될 것이고 한국경제는 더욱 침체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 지금의 세계경제는 미국, 일본, 유럽의 선진국들이 자국의 통화량을 무제한 발행해야 할 정도로 불황 상태에 놓여 있다. 한국 수출품의 시장의존도가 가장 높은 중국경제도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낮출 만큼 여건이 좋지 않다. 게다가 내년에 미국이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 브라질·인도네시아 등 일련의 신흥국 경제가 달러 유출로 인해 갑자기 침체 상태에 빠질지 모를 살얼음판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개별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상태를 정상화한다 해도 수출을 늘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국내외적 여건 아래에서 한국경제는 어떻게 활로를 열어가야 할까.

 물론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노동개혁이나 금융개혁 등 일련의 개혁정책들이 치밀한 계획 아래 착실히 추진돼야 한다. 하지만 그와 병행해 시급히 요구되는 대책은 강력한 정책수단을 동원해 현재의 원고 상태를 원저 상태로 유도해 엔저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련의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칫 개혁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혼란만 야기되고, 이에 따라 경제가 한층 침체 상태에 빠져 더 이상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흔히 한국 통화는 국제통화가 아니므로 통화량을 증가시켜도 원저 효과를 발생시킬 수 없다고 단정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가령 우리도 일본 수준으로 통화량을 증가시킨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당연히 원화가치가 하락할 것이고, 해외에서 한국에 들어오는 달러와 엔화 등이 종래와 동일한 비율로 한국 원화를 구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우리와 무역거래가 많은 개발도상국과 원화-해당국 통화 간 통화스와프 거래를 하는 방법도 있다. 그들 국가 역시 원하는 한국 상품을 한국 원화로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에도 한국의 통화량을 2배로 증가시킨다고 하면 개발도상국과의 화폐 교환비율도 종래와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고, 원화가치는 자연스레 평가절하될 것이다.

 선진 각국의 중앙은행은 작금의 비상 사태를 맞아 자국 경제의 생존, 안정,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정책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한국의 중앙은행은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식의 소극적 반응만 보여 답답할 따름이다. 자유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 경제에서는 버냉키, 옐런, 드라기, 구로다 등 그 나라 중앙은행 총재 이름만 알려질 정도로 경제정책 중 금융정책이 강력한 정책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국가의 중앙은행 정책도 최근의 경제 환경 변화를 반영해 물가 안정에만 얽매이지 않고 경제 안정에 역점을 두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이와 함께 경제 안정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양적완화라고 하는 비전통적 수법까지 대담하게 구사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중앙은행과 그 주변의 이론가들은 한국경제가 상당히 침체 상태로 치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의 정책태도에서 이렇다 할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는 한국의 통화 당국도 더 이상 예의주시만 하지 말고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국민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보다 적극적 행동이 요구된다. 통화당국의 분발을 기대한다.

이종윤 한일경제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