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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미술전문기자 '거북이' 이구열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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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서울 충정로에서 1975년 8월 15일 간판을 건 한국근대미술연구소는 네 번의 이사를 거쳐 당주동에서 개소 30주년을 맞았다. 큰 일이 없으면 늘 오전 10시30분 출근해 해질녘까지 자료를 읽고 글을 쓰는 이구열씨는 “맨손의 의지 하나로 지금까지 이끌어온 이 연구소의 과정은 그대로 내 후반생의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최정동 기자

▶ 이구열씨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의뢰로 일본 근대미술 컬렉션 등 소장품을 조사연구한 덕수궁 이왕가미술관의 1930년대 모습. 여러 사정으로 공개하지 못했던 당시 논문을 『한국근대미술연구소 30주년 기념 논총』에 실었다.

그가 신문에 쓴 필명은 '거북이'였다. 1950년대부터 미술기자로 이름을 날린 청여 (靑餘) 이구열(73)씨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끈질기게 한국 미술계와 함께 걸어왔다. 날카롭고 정확한 비평으로 화단을 긴장시켰던 1세대 미술전문기자였고, 누구보다 먼저 근대미술의 자료 수집과 정리에 나선 개척자였다. 73년 마지막 일자리였던 대한일보사가 군사정권의 폭력으로 폐간돼 자유인이 된 그는 75년 8월 15일 광복 30주년에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세우고 소장이 됐다.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연구소를 홀로 지킨 지 30년. 이제는 80여 명을 헤아리는 근대미술 연구자가 그의 뒤를 잇고 한국근대미술사학회도 생겼다.

연구소 개소 30주년을 맞는 올해, 그를 따르는 후학이 뜻을 모았다. 한국근대미술사학회가 내는 학회지 특별호로 '이구열 선생 한국근대미술연구소 30주년 기념 논총'을 꾸몄다. 이씨 자신이 쓴 '국립중앙박물관의 일본 근대미술 컬렉션'과 12명 연구자가 쓴 논문을 담았다. 축하 글을 보낸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선생이 쓴 저술과 저서는 모두 한국 근대미술 연구의 귀중한 문헌이 됐다. 연구소에 대한 지원도 있어야 하고 명칭도 '이구열근대미술연구소'로 개칭했으면 생각한다"고 썼다.

8일 저녁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30년 묵묵히 외길을 걸어온 선생의 꿋꿋한 발자취를 더듬는 자리로 훈훈했다. '한국근대미술산고' '나혜석 일대기-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국전 30년' '근대 한국화의 흐름' '한국문화재 수난사' '북한 미술 50년'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등 쉼없이 펴낸 저술 하나하나가 이야깃거리였다. 75년 11월 제1호를 낸 연구소 기관지 '한국의 근대미술'은 이제 역사가 됐다.

서울 충정로의 한 인쇄소 건물에서 더부살이로 시작한 연구소 사무실의 역사도 관철동과 견지동 시대를 거쳐 당주동까지 네 번의 이사로 사연이 많다. 청여는 "일정 수입이 없는 처지에 어떻게 꾸려왔느냐고 다들 수수께끼처럼 묻는데 그저 이렇게 저렇게 견디며 살아왔다"고 옛일을 돌아봤다.

청여는 목숨처럼 알뜰하게 모은 근대미술 자료 4만 여건을 삼성미술문화재단 자료실에 기증해 삼성미술관 리움 부설 '한국미술기록보존소'탄생의 아버지가 됐다. 그는 연구소 40주년을 향해 다시 거북이의 길을 나서는 참이다.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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