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7) 제79화 육사졸업생들(70)|4기생|장창국

중앙일보

입력 1983.01.22 00:00

지면보기

종합 07면

군영에서 육사 10기까지의 장성 진급자수를 보면 4기생이 가장 적다. 일반 학교에서도 그렇지만 해에 따라 번성한 학년이 있고 침체된 기가 있는데 육사에서는 4기가 특히 침체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이유를 4기생 자신들은 4자는 곧 사자라면서 입교 순번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우선 입교자·임관자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6·25가 났을 때 4기생이 중대장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유중 하나다. 초전에서 우리가 밀리고 후퇴할 때 4기생 임관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38명이 전사했다. 당시 소대장급들이었던 8, 9, 10기는 피해가 더욱 컸다.
4기생이 성장할 즈음엔 군의 자리가 어느 정도 매워졌다. 4기생에 앞서 군영에서 3기까지 이미 6백40여명의 장교가 배출돼 있었으니 선배기들이 누린 파격적 진급의 「행운열차」는 이미 떠난 뒤였던 것이다.
4기의 분위기는 대체로 사교적이 못되고 점잖은 편인 것 같다. 그래서 성실하다는 말은 듣지만 세속적인 출세에는 처진게 아닌가 생각된다.
4기출신으로 대장이 된 사람은 현재 향군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종환장군 (60·경기 화성) 한사람이고 중장도 2군사령관을 지낸 이병형장군(57·함남 북청) 뿐이다.
4기생 1백20명이 육사에 입교한것은 3기생이 졸업한후 약 l개월뒤인 47년 5월16일이었다.
입교생 대부분이 1, 2, 3기와 같이 8·15해방 전에 중국·일군·만군등에서 군사경력이 있던 사람과 경비대의 창설요원으로 입대, 하사관 또는 사병으로 복무하던 사람이었다.
당시 교장은 경비대 사령관인 송호성준장이 겸직을 했고 정일권중령이 부교장을 맡았다.
송장군은 광복군 출신 대령으로 해방 전에는 중국 지방 군벌의 소장이었다.
그는 광복군 지대장이라는 마지막 직책을 가지고 해방과 더불어 귀국해 정세를 관망하다가 같은 광복군 출신인 통위부장 유동열장군의 권고로 육사 2기로 입교, 20여일 정도 있다가 교육 도중 소령으로 임관됐다.
그는 임관한지 2개월만에 경비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준장으로 약 2년동안 재임했고 정부수립후 국군으로 개편되면서 경비대 사령관이 아닌 육군 총사령관도 지낸 인물이다.
해방후 최초로 장군에 진급됐고 정부수립 당시 유일한 한국급 장성이었다.
4기생 때도 행군과 숙영이 가장 어려운 훈련이었는데 졸업에 즈음한 춘천행군때 처음으로 미군이 2차대전때 사용하던 짧은 가죽각반이 달린 군화가 지급됐다. 그러니까 4기에 가서야 육사생들은 일본군화와 각반을 벗어 버리게 된 것이다.
4기생의 최고봉인 김종환장군은 동기생중 제일 먼저 장군이 됐고 군시절에는 보안사령관·군사령관·합참의장을 역임했다.
특히 10·26당시 합참의장을 지낸 연고로 80년 5·17직후 개각때 내무장관으로 등용돼 과도기의 치안을 맡았었다.
주로 남의 말을 경청하는 편인 그에 대해서는 동기생이나 선배들까지도 점잖은 양반이라는 호평을 하고 있다. 현재는 재향군인회 회장을 맡아 예비역 장병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