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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초코파이 철수한 개성공단, 천하장사·막대커피 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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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평양어린이식료품공장을 찾은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 북한은 개성공단 근로자에게 초코파이 대신 북한 과자를 간식으로 줄 것을 요구했다. [사진 노동신문]

개성공단에서 초코파이가 사라졌습니다. 한때 125개 업체에서 일하는 5만3000여 명 북한 근로자의 입맛을 사로잡은 간식거리지만 올 겨울 들어 퇴출당했다고 합니다. 한국산 초코파이의 달콤함에 빠진 주민들이 자칫 ‘황색바람’(자본주의 문화를 일컫는 북한식 표현)에 물들까 우려한 북한 당국의 통제 때문이죠. 그 자리를 찰떡파이와 간식용 소시지 ‘천하장사’가 채웠는데요. 북한에선 ‘막대커피’로 불리는 커피믹스도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합니다.

‘라면전쟁’도 벌어진다는데요. 북한 당국은 끓인 라면을 제공하길 원하지만, 근로자들은 포장을 뜯어낸 채 내용물을 챙겨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하지만 초코파이의 인기를 넘어서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측 공단 관리기관인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에서 최근 황당한 요구를 해왔다고 합니다. 간식용 과자류 포장에 한글이나 관련 상표를 빼고 아무것도 표기하지 말라는 주장인데요. 한발 더 나가 포장지에 고유한 일련번호를 새겨달라는 요구도 했다는군요. 암시장이나 전문 수집상에게 팔아넘기는 등 돈벌이에 쓸 경우 쉽게 추적하려는 의도에서라고 우리 당국자들은 분석합니다. “일일이 번호를 매기는 건 기술적으로 어렵고, 말도 되지 않는다”고 겨우 설득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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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예 특정 북한 과자를 간식으로 써달라고 우기는 바람에 몇몇 업체는 울며겨자먹기로 이를 받아들였다고 하는군요. 북측 근로자 대표격인 직장장이 현지 우리기업 법인장에게 “노동자들은 이 과자가 좋다고 한다”며 강매하다시피 했다는 건데요. 저도 평양이나 금강산 방문 때 비스켓 형태의 북한 과자를 맛 본 적이 있는데 품질이나 맛에서 우리 과자와 현격한 차이가 났습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간식으로 외화벌이를 하려는 것”이라고 꼬집습니다.

 개성공단을 매개로 한 ‘한류(韓流)’ 유입을 막으려는 북한 당국의 노력은 이처럼 집요합니다. 하지만 이미 초코파이로 남한 사회를 체험한 북한 근로자와 그 가족·친지 등(정보 당국자들은 20만~30만 명으로 추산)을 다잡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개성공단의 의류 브랜드들은 품질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완성품을 창고에 쌓아 두는데요. 대부분 북측 근로자들이 챙겨 간다고 합니다. 업체 관계자는 “옷에 부착할 상표가 통째로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전합니다. 암시장에서 한국 옷이 인기를 끌자 중국산에 한국 상표를 달아 거래한다는 겁니다.

 개성공단은 북한 주민들의 전력 공급원이기도 합니다. 대북 전략물자로 간주돼 엄격히 금지된 전기를 북한에 대준다니 무슨 말이냐고요. 공단 근로자들이 출근 때 챙겨오는 배터리형 충전기가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아침에 공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콘센트에 이 충전기를 꽂습니다. 퇴근 때 가져가 전등도 켜고, TV를 시청하는 데 쓴다는 얘기인데요. 너도나도 충전하다 보니 과열돼 화재사고도 심심찮게 발생했다는군요. 이제는 전용 콘센트까지 마련해준 기업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개성공단 근로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라 할 수 있죠.

 근로자 출퇴근엔 280여 대의 공단관리위 버스가 동원됩니다. 서울에서 운행되던 시내버스를 중고로 도입한 건데요. 북측 주민들 사이엔 “힘 좋고 고장없는 차”로 입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공단 내 탁아소엔 한 살 미만 유아 600명이 있는데요. 최근 2대의 최신형 한국산 버스가 제공돼 화제가 됐다고 합니다. 이 곳 탁아소엔 우리 민간단체가 지원한 분유·기저귀 등이 제공됩니다.

 개성공단은 지난 15일로 가동 10주년을 맞았습니다. 첫 생산품인 개성공단 냄비가 가동 당일 서울의 백화점에서 판매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금강산 관광과 함께 대북 햇볕정책의 쌍둥이로 불렸지만 이젠 홀로 남아 남북경협과 교류의 산소호흡기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북한은 최근에도 공단근로자의 임금 상한제한(연간 5%)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겠다고 나서 불안하게 만들고 있죠.

 연간 8000만 달러(876억원)의 임금을 북측에 건네면서도 우리 기업인들이 북한당국에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도 듭니다. “교회를 불허한다면 공장을 철수하겠다”고 버텨 북한으로부터 개성공단 내 첫 교회설립을 얻어낸 현지 의류업체 신원그룹 박성철 회장의 뚝심은 좋은 사례입니다.

 내일은 북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양건 노동당 비서가 개성공단을 찾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3주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조의를 표한 데 대한 답례 차 온다는 겁니다. 지난해 4월 김양건이 이 곳을 다녀간 직후 공단 폐쇄조치가 내려졌다는 점 때문에 우리 당국은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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