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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배명복 칼럼

북한인 듯 북한 아닌 북한 같은 소니 해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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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는 표현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사인 소니픽처스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사이버 공격의 배후 말이다. 소니는 성탄절에 맞춰 ‘감히’ 북한의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영화를 개봉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범행 동기로 보면 딱 북한이다. 문제는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점. 그럼에도 미 연방수사국(FBI)은 사건 발생 25일 만에 북한을 배후로 콕 찍었다. 곧바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비례적 대응’을 선언했고, 미 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자칭 ‘평화의 수호자(GOP)’라는 해커들의 공격으로 소니가 쑥대밭이 된 것은 지난달 말. 회사 전산망이 다운되고, 할리우드의 유명 인사와 전·현직 임직원 등 4만7000명의 개인정보와 미개봉 영화 5편의 동영상 파일이 유출됐다. 임직원이 주고받은 e메일도 예외는 아니다. 소니의 공동대표인 에이미 파스칼은 톱스타 앤젤리나 졸리에 대해 ‘실력 없는 싸가지’니 ‘얼굴마담’이니 하며 뒷담화를 한 사실이 드러나 곤경에 처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몰래 호텔을 예약할 때 사용하는 가명 리스트도 공개됐다. 소니 스튜디오에 투하된 사이버 폭탄 한 방에 할리우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됐다.

 소니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와의 인터뷰 기회를 잡은 TV 토크쇼 진행자와 연출자가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령에 따라 김정은을 암살하는 과정에서 벌이는 저질 소동을 다룬 B급 코미디 영화 ‘인터뷰’의 개봉을 전면 취소한 것.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에 대한 테러 협박 때문에 메이저 영화관 체인들이 줄줄이 상영을 포기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소니 측 해명이지만 개봉을 강행할 경우 회사가 문 닫게 될지 모른다는 극도의 위기감이 반영됐다는 후문이다. 테러 위협에 굴복해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포기했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자 소니는 다른 플랫폼을 이용한 대체개봉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을 바꿨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소니는 이번 사태로 영화 제작비 4400만 달러와 마케팅 비용 3500만 달러를 날렸다. 예상 판매수입과 컴퓨터 시스템 복구 비용,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손해배상과 소송비용까지 감안하면 총 손실액이 수억 달러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다.

 소니를 공격한 배후가 정말로 북한이라면 북한은 미국에 제대로 한 방 먹였다고 볼 수 있다. 진짜 핵무기를 쓰지 않더라도 머리만 잘 쓰면 돈도 안 들이고, 증거도 안 남기면서 핵무기급 펀치를 날릴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물론 북한은 발뺌하고 있다. 증거를 내놓으라고 되레 큰소리치며 미국에 공동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사실 FBI의 수사 결과 발표문에 ‘증거’란 표현은 한마디도 없다. 악성코드와 범행 수법의 유사성 등 여러 ‘정보’에 비추어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짓기에 충분하다고 돼 있을 뿐이다. 북한 소행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런 애매한 상황이다.

 사이버 공격은 증거를 찾기 어렵다. 국가 간 사이버 공격이 종종 있었지만 명확하게 진상이 밝혀진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유야무야 넘어갔다. 미국이 이번처럼 특정 국가를 공격의 배후로 지목한 것은 처음이다. 오바마는 이번 사태를 국가안보의 문제로 규정하고 엄중한 대응 방침을 천명했다. 미국의 자존심인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 대한 직접 공격도 공격이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가 깡패국가 독재자 손에 훼손됐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위협에 한번 굴복하면 계속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확실한 증거도 없이 정황정보만으로 북한에 죄를 묻는 것은 혐의만 갖고 피의자를 처벌하는 꼴이다. 법치를 강조하는 미국이 할 일은 아니다. 뉴욕타임스가 사설에서 독립적 국제조사단에 조사를 맡기고, 처벌은 그 결과에 따르자고 주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천안함 폭침 사건 때도 한국은 국제조사단을 구성했다. 북한이 요구하는 공동조사도 말이 안 된다. 피의자가 수사에 참여하겠다는 꼴이다.

 소니가 백기투항하던 날, 미국은 쿠바와 53년 만의 역사적 수교를 선언했다. 핵과 장거리 미사일이 없는 쿠바는 물론 북한과 다르다. 그렇더라로 제재 일변도의 압박정책만으로 상호이익을 도모할 수 없다는 교훈은 북한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지금 미국에 필요한 것은 사태를 냉정하게 보고, 슬기롭게 풀어가는 대국다운 지혜와 신중함이다. 저질 코미디 한 편에서 촉발된 이번 사태가 북·미 간 극한대결로 치닫는 것이야말로 진짜 코미디다. 소니 해킹 사태에도 불구하고 쿠바 다음은 북한일 수 있다는 기대가 꺾여서는 안 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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