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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7)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50) 장창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2기생 교육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관학교에선 예기찮은 사건이 터졌다. 육사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관생도의 교관 구타 하극상 사건이다.
생도대장인 이치업대위가 졸업을 10여일 앞둔 어느날 밤 일단의 사관 후보생들로부터 곡괭이 자루로 얻어맞고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후보생도들은 한밤 이대위의 침실에 들어가 취침중인 이대위를 담요로 ,뒤집어 씌우고 곡괭이 자루로 인사불성이 되도록 구타한뒤 유유히 내무반으로 돌아갔다.
군영출신인 이대위는 곧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는 후에 13연대 창설 연대장이 됐고 준장으로 예편하여 지금은 도로공사 상임고문으로 있다.
사건후 1주일에 걸친 조사 결과 서모 후보생등 6명이 용의자로 지목돼 퇴교. 일단 사건은 수습됐다. 그러나 군, 그중에도 사관학교에서 후보생이 생도대장을 구타한 사건은 있을 수 없는 반군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하나의 오점을 남긴 셈이다.
당시 나는 사관학교를 떠나 제주에서 제9연대 창설작업을 하고 있었다. 원용덕교장도 12월초 제8연대장으로 전보돼. 사건때는 김종석소령(군영출신)이 교장대리로 있었다. 이치업대위는 완치된 뒤 사관학교에 돌아왔다. 김종석소령에 이어 교장 대리로 이듬해(47년)1월23일 3대교장 정일권소령이 부임할때까지 일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초창기 전통없는 우리군이 안아야 했던 많은 모순과 갈등이 깔려 있다.
우리 군은 미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재식훈런·부대편성·전술 등에 모두 미식을 도입했다. 그러나 내무생활만은 과거 일본군의 것 그대로였다. 또 대부분 군사경력자들이 일본군 또는 그 영향 하에 있던 만주군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라 일본군대식 사고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배운 것이 그뿐』이라는말이 있지만 기합과 구타라는 전통적인 일본군식 통솔법이 초창기 우리 군에서도 답습됐다.
사관학교에서도 이같은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 때론 후보생들에게 기합과 구타가 있었다. 신생 우리나라의 군간부가 된다는 포부를 품고 모여든 후보생들에게는 이것은 큰 불만이었을 법하다.
더우기 해방후의 혼란기였던만큼 과거의 선배가 뒤늦게 군에 들어가 후배가 되는등 서열이 뒤바뀌고 온갖 성분의 사람들이 한데모여 갈등은 더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의 나이차도 없었다. 학력도 별 차이가 없었고 군경력이나 군사지시에서도 모두가 미국 것을 배우는 판이라 크게 월등할 것이 없고 보니 자연히 통솔이 어려울수 밖에 없었다.
학풍과 전통이 없는 사관학교에서 후보생들의 일상생활을 지도·감독하는 생도대장이 자연히 표적이 꽤 사건을 빚은 셈이다.
이 불미스런 돌발사건이 있기는 했으나 2기생들의 교육은 1기생때 보다는 훨씬 짜임새 있게 진행됐다.
졸업 한달전인 46년 11월9일에는 유동열통위부장을 비롯한 많은 내빈이 임석한 가운데 연합체조·무술시범·분열등 친열식을 갖기도 했다. 이 행사에는 1연대 장병 6백여명도 합세,장엄한 의식을 이루었다. 이튿날 신문에는 『새조선국방 맡을 8백여 장정, 면면마다 불굴의 기백』이란 제목아래 3단 기사로 사진과 함께 이 행사를 감격스럽게 보도 했다.
2기생들 때도 교가나 그밖의 군가가 별로 없어 1기생 때와 같이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의 깃발…』 하는 용진가와 『청년아 청년아 나오라 청년아, 대한의 피를 받은 청년 청년아』 하는 청년가를 불렀는데, 2기생중 최연장자인 이규간장군(준장·경리감·전대한노인회장)이 『백두산성봉아래 금수 3천리…』 하는 2기생가를 만들어 함께 불렀다. 2기생들은 지금도 돕기모임때는 이 2기생가를 부른다고한다. 용진가는 l기로 입교했다 자퇴한 예관수후보생(만주군관학교출신·대령)이 작사했고 청년가는 정일권장군 작사로 전한다.
2백63명의 2기생 입교자중 12월14일졸업. 임관한사람은1백96명이다. 60여명은 퇴교·자퇴등으로 중도에 탈락한 것이다.
일부 기록에는 임관자가 1백93명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통위부에서 임관 특명자 명만을 옮켜 적을 때 3명을 빠뜨린 탓으로 추정된다.
12월1일자로 참위·부위·정위하는 구힌국식 계급칭호가 소위·중위·대위의 현재 칭호로 바뀌어 2기생들은 처음으로 「소위」로 임관한 사관후보생이 된다.
사관학교는 성적순으로 군번을 부여하는데 2기생중 가장 빠른 군번은 10l64번 신재식후보생(소장)이다. 박정희전대롱령은 3위로 l0l66번, 문형태대장이 4위, 한신대장이 20위, 심오선대장이 34위, 이세호대강이 90위로 나타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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